조사 연구에서는 문헌과 자료가 많을수록 좋지만, 자료들 사이에 상충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상충하는 자료들을 통합해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지, 혹은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이어서 취사선택이 필요한지를 가리는 것이 연구자의 일이다. 상충과 모순이 일어난 이유까지 밝힐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최승희의 <기생춤>이 그런 예이다. 미주 조선인 유학생회의 격월 소식지 <조선인 유학생 회보(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8년 2-3월호(16권 2호, 3면)는 최승희의 뉴욕 공연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최승희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최초의 조선인 무용가"라면서 사진 한 장을 게재했는데, 이 사진에는 "Miss Choy in Korean Sweetheart's Farewell Dance"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이 조선인 유학생회의 소식지는 최승희의 1938년 11월 6일 뉴욕 길드극장 공연을 다시 한 번 기사화했는데, 이때도 같은 사진을 사용하면서 같은 사진 설명을 붙였다. 그런데 바로 이 사진 설명이 혼란을 일으켰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 자료를 분석하면서 나는 <민요조>가 <아리랑>으로 개칭되었던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아리랑>은 영어로 번역될 때 <Arirang>이라는 고유명사로 표기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Korean Sweetheart's Farewell Dance>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민요 <아리랑>의 노랫말이 연인과 이별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영어 문헌에 기록된 <Korean Sweetheart's Farewell Dance>가 다시 한국어 신문에 인용될 때는 <상별곡>이라고 재번역되곤 했다. ‘서로 이별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민요조>와 <아리랑>과 <Arirang>, <상별곡>과 <Korean Sweetheart's Farewell Dance>는 모두 같은 작품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조선인 미국 유학생들의 영문 회보가 <Korean Sweetheart's Farewell Dance>라는 설명과 함께 게재한 사진은 다른 자료에 나타난 <아리랑>이나 <민요조>의 사진과 달랐다.
<민요조>의 의상은 소박한 한복이며 머리에 두건을 썼지만, 손에는 아무런 소품을 들지 않았는데, 이 유학생 회보의 사진에 나타난 의상은 화려한 한복에 머리에는 은잠 장식을 했고, 손에는 수건 또는 보자기를 들고 있다. 이 작품이 <아리랑>일 수 없다는 뜻이다.
해결의 실마리는 미주 한인교포 신문인 <신한민보(1938년 2월 10일)>가 제공했다. 이 신문은 최승희의 LA 공연(2월 2일, 이벨극장)을 보도하면서 <아리랑>을 "님을 이별하는 춤"이라고 소개하는 한편, <기생춤>은 "머리를 쪽지고 은잠을 꽂고 절은 저고리에 긴 치마를 받쳐 입고 허리를 색대로 질끈 동이고 수건을 휘날리면서 손(님) 앞에서 춤을 추어 얼빠진 부랑자들을 녹아내게 하는 간드러진 춤"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이 <기생춤>이 조선인 유학생 회보에 게재된 사진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즉, 유학생 회보에 실린 사진 설명은 <아리랑>이 아니라 <기생춤>이었던 것이다.
<기생춤>은 매체에 따라서 다른 제목으로 표현되곤 했다. 1937년 9월 27-29일 도쿄 공연 프로그램은 <무녀(舞女)>, 1938년 1월 22일의 <니치베이신문(日米新聞, 3면)>은 <경성의 예기(京城の藝妓)>, 1938년 4월 5일의 <동아일보(5면)>는 <조선 무희>, 1938년 10월 4일의 <신세카이 아사히신문(新世界朝日新聞, 3면)은 <관기(官妓)>라고 표기했지만, 모두 <기생춤>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이었다.

의문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최승희의 파리 공연(1938년 1월 31일, 살플레옐 극장) 레퍼토리에도 <기생춤(Danse de Kiisan)>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작품의 해설이 <신한민보>의 서술과 달랐다. 파리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기생춤>이 “장구를 맨 기생이 춤추며 노래하면서 방랑 시인의 관심을 빼앗는다.”라고 서술되었다.
즉 LA와 뉴욕에서 상연된 <기생춤>에서는 소품으로 “수건”이 사용되었지만, 파리에서 공연된 <기생무>에서는 “장구”가 사용되었다. 파리의 <기생춤>은 유럽의 여러 신문에 사진이 게재되었는데, 이 사진을 바탕으로 배운성 화백은 판화작품 <장구춤(1955)>을 제작한 바 있다. 이 판화는 최승희 무용 30년을 기념하는 <최승희 무용 미술 전람회>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기생춤>과 <장구춤>은 전통적으로 내용과 맥락이 달랐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기생춤>은 ‘기생이 손님을 유혹하거나 즐겁게 하기 위한 춤’이지만, <장구춤>은 ‘풍년을 기원하거나 추수를 감사하는 춤’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샌프란시스코 공연 레퍼토리에는 <기생춤(Seoul Geisha)>과 함께 <축제의 춤(Festival Dance)>이 포함되어 있는데, <축제의 춤>에서는 ‘장구’를, <기생무>에서는 ‘수건’을 소품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38년 10월 4일의 <신세카이 아사히신문(3면)은 11월6일의 뉴욕 공연에서도 <기생춤>과 함께 <풍년춤(豊年踊)>이 상연되었다고 전했다.
최승희의 파리 공연과 브뤼셀 공연에서는 <축제의 춤>이나 <풍년춤>이 발견되지 않았다. 또 신문에 보도된 사진들로 미루어볼 때 최승희는 <기생춤>에서 ‘수건’ 대신 ‘장구’를 소품으로 사용했다. 즉, 미국에서 장구를 사용한 <축제의 춤>이 파리 공연에서는 <기생춤>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국 공연의 <기생춤>, 즉, 수건을 소품으로 사용했던 <기생춤>은 어떻게 됐을까.

2월 28일의 칸 공연과 3월 1일의 마르세유 공연에서는 <기생춤>이 어떤 소품을 사용해 상연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공연 프로그램이 발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4월 2일의 독일 뒤스부르크 공연에서는 1부의 첫 연목이 <2개의 기생춤(Zwei Kijsan-Tänze)>이었고, 4월 17일의 네덜란드 덴하크 공연에서도 첫 연목이 <2개의 기생춤(twee Kiisan Dansen)>이었다.
지금까지 수집된 문헌 기록으로 보면 최승희는 적어도 1939년 4월부터 유럽에서 2개의 <기생춤>을 상연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두 작품 중에서 한 개의 기생춤에서는 수건을, 다른 한 개의 기생춤에서는 장구를 소품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jc, 2025/12/16; 2026/4/1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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