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었던 재미 일본인 교포 신문 <니치베이(日米)신문>의 1937년 12월 13일 자 일본어판(5면)에 “조선의 새로운 천재 최승희 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이 결정되고, 첫 목적지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가 될 것으로 발표된 후에 나온 보도였다.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이 낳은 음려화(陰麗華)로서 고국의 예단에 피어나고 있는 최승희 양(24세)은 이번에 유럽과 미주 순업의 여행에 오르게 되어 아마도 17일에 출범하는 히라카와마루(永川丸)로 도미(渡米)해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을 거쳐 1월 중에 뉴욕으로 갈 예정이다.”
최승희가 요코하마에서 출발한 것은 12월 29일이었으므로 기사의 예고보다 이주일쯤 늦었고, 선편도 히라카와마루가 아니라 치치부마루였다. 제1차 미국 공연에서는 시애틀 공연이 없었고, 뉴욕에 도착한 것도 2월이었으므로, <니치베이신문>의 보도는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그런데 기사의 첫 문장에 나온 “음려화”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조선이 낳은 음려화(朝鮮の生んだ陰麗華)”는 무슨 뜻일까? 필자의 최승희 연구를 자주 도와주셨던 일본인 작가 무라야마 도시오(村山捘夫) 선생에게 문자로 질문드렸다.
무라야마 선생은 음려화가 ‘아름답고 덕이 높았던 중국의 황후’라며 위키 백과사전의 링크를 보내주셨다. 영어판과 일본어판, 중국어판에는 있는데 한국어판에는 항목이 없다. 즉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한국식 한자음으로는 ‘음려화’라고 읽게 되지만 중국식 발음은 ‘인리화(陰麗華, AD5-64)’이다. 중국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 광우(光武帝)인 리우시우(劉秀, Liu Xiu, BC5-AD57)의 첫 아내이자, 두 번째 황후였다. 첫 아내가 두 번째 황후가 되었던 것은 리우시우가 정략결혼을 했던 구오센통(郭聖通, AD6-52)를 첫 번째 황후로 봉했기 때문이다.

후한서에 따르면 리우시우는 젊은 시절부터 “벼슬은 지진유, 아내는 인리화(仕官當至執金吾, 娶妻當得陰麗華)”라는 인생 목표를 세웠다. 지진유(執金吾)는 수도(capital)의 시장(mayor)이므로 황제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리우시우는 자신의 목표대로 AD23년 인리화와 결혼했는데, 리우시우가 28세, 인리화가 18세였다. 그는 또 AD25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그는 AD37년(42세)에 중국을 재통일했다.
중국 황제 리우시우의 치세(AD25-57)는 4명의 로마 황제의 통치 시기와 겹친다. 즉, 티베리우스(AD14-37), 칼리굴라(AD37-41), 클라우디우스(AD41-54), 네로(AD54-68)가 갈등과 투쟁 속에서 짧은 황권을 이어가는 동안, 리우시우는 약 32년 동안 통일된 중국을 통치했다.
명(明)나라 말기의 대학자 왕푸지(王夫之, 1619-1692)는 리우시우를 “삼대 이래 태평성대(三代以下稱盛治)”를 이룬 황제라고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하상주(夏商周) 시대(BC2070-BC770) 이래로 태평성대를 이룬 것은 광무제 리우시우가 처음이었다는 뜻이다.

리우시우는 황제 즉위 직후에 인리화를 황후로 지명하려 했으나 인리화가 거절했다. 그때까지 아들을 출산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리우시우는 인리화의 요청대로 두 번째 부인인 구오센통을 황후로 책봉했다. 이를 두고 후세의 사가들은 인리화의 겸양과 인덕을 칭송했다. 이후 인리화는 5명의 아들을 낳았다.
구오센통이 총애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문제를 일으키자, 리우 시우는 AD41년에 구오센통의 황후 지위를 폐하고, 인리화를 황후로 책봉했다. 폐위된 후에도 구오센통은 목숨을 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를 누렸고, 황태자에서 폐위된 그녀의 장남도 많은 토지를 받았다. 구오센통은 AD52년에 사망했고 리우시우와 인리화의 애도를 받았다.
AD57년 리우시우가 62세로 사망한 후 인리화는 황태후가 되었고, 그녀의 장남이 후한의 2대 황제로 즉위했다. 인리화는 아들의 황제 재위 중인 AD64년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같은 사적 때문에 인리화는 한나라를 중흥시킨 광우 황제에게 걸맞았던 황후로 칭송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황후 자리와 아들의 황태자 자리에 욕심내지 않고, 구오센통과 그녀의 아들에게 양보했으나, 결국 그 자리는 자신과 아들에게 돌아왔다.
요즘이라면 “재주 있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사람도 운 좋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말로 요약되고 말 일이지만, 지난 2천 년 동안 중국인들은 인리화가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탐욕을 멀리하고 겸양의 덕을 유지한 덕분이라고 평가해 왔다.
최승희를 “조선이 낳은 인리화”라고 쓴 <니치베이신문>의 기사에는 글을 쓴 기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으로서 조선의 상황과 중국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최승희를 인리화에 견준 것은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겸양의 덕을 갖춘 미인이라는 칭찬이었을 것이다.

한국 역사에도 전설적인 미인이 많다. 고구려의 관나 부인, 백제의 도미의 처, 신라의 미실과 선화공주와 수로 부인, 고려의 기황후, 조선의 어우동과 장녹수와 황진이와 장희빈 등이 그들이다. 이중 미모와 함께 지혜나 지조나 덕으로까지 칭송받은 미인이라면 도미의 처와 선화공주, 수로부인과 황진이일 것이다. 여기에 해피엔딩을 누린 지체 높은 미인이라면 백제 무왕의 황후가 된 선화공주와 성속의 흠모를 받은 수로부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를 쓴 일본 기자가 선화공주와 수로부인을 알았을 리 없다.
일본에도 전설적인 미인들이 있었다. 헤이안 시대의 미모 시인 오노노 코마치 (小野小町), 전국시대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았던 요도도노 (淀殿), 카마쿠라 시대에 미모와 정치적 수완을 겸비했던 호조 마사코 (北条政子) 등이 그들이다.
<니치베이신문>의 기자가 최승희를 한국이나 일본의 미인 대신에 중국의 미인 황후에 비유한 것은 뜻밖이다. 오히려 진부하지 않고 재치 있는 표현이다. 중국 미인 중에서도 양귀비나 초선이라고 했으면 식상했을 것이다. 한국인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와 덕을 겸비한 중국의 미인에게 최승희를 비견한 이 기사는 90년이 지난 후에 읽어도 신선하게 느껴진다. (jc, 2025/11/27; 2026/3/29) ⓒ조정희
'최승희100장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Choi Seung-hee 100 Scenes] 6. Yin Lihua (陰麗華) (0) | 2026.04.01 |
|---|---|
| [崔承喜100シーン] 6. イン·リフア(陰麗華) (0) | 2026.04.01 |
| [100 Scenes of Choi Seung-hee] 5. New York (0) | 2026.03.31 |
| [崔承喜100シーン] 5. ニューヨーク (0) | 2026.03.31 |
| [최승희 100장면] 5. 뉴욕 (0) | 2026.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