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9월1-3일의 제4회 경성공연에서 발표된 또 하나의 최승희 독무작품은 <십자가(1931)>였다. 이 작품은 1931년 11월23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양현여학교 후원공연에서도 공연됐으므로,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열린 벌교공연에서도 상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제목과 최승희의 독무였다는 점을 빼고는 어떤 해설이나 평론도 발견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1931년 8월29일의 <조선일보(5면)>에 실린 흐릿한 사진 한 장뿐인데, 이 사진으로는 <십자가>의 내용이나 메시지를 추론할 단서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십자가>가 안무되었던 시기를 살펴보기로 했다. 당시 최승희가 처했던 조선의 사회상황과 예술상황을 이해하면 그 시기에 창작된 작품들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는 1931년 9월1-3일 단성사에서 열린 제4회 경성공연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므로, 이는 최승희가 결혼(5월9일)한 직후였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저는 남편 안막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작품에도 그것이 강하고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 결혼 후 이것이 시류에 발맞춰 경향적으로 진전되어 <해방되는 사람>, <빛을 구하는 사람>, <태양을 구하는 사람> 등 다소간 의식적인 작품을 해서, 그것이 점차 제 자신의 처지의 변화로부터 심화되어 갔습니다.”
최승희가 말한 “시류”란 “브나로드 운동”이다. 1929년 11월3일의 광주학생운동은 조선 전역으로 번졌고, 이 항일 투쟁에 참가한 학생이 약 5만4천명, 검거자수가 1,641명에 이르렀다.
일제 경찰과 헌병의 강압적 진압으로 학생들의 투쟁은 표면적으로 진압됐지만, 젊은이들은 독서모임을 조직해 민족현실에 대한 학습을 진행하는 한편, 민중과의 직접적인 연계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1930년대 조선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 혹은 농촌계몽운동이다.
농촌계몽운동은 민족언론의 협력으로 급속하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동아일보>의 창간15주년(1935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심훈(沈熏, 본명 심대섭沈大燮, 1901-1936)의 <상록수(1935)>가 이 시기의 사회상과 농촌계몽운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학작품이다.
<상록수(1935)>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은 농촌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최용신(崔容信, 1909-1935)이다. 함경남도 현면 두남리(=원산)에서 태어난 최용신은 루씨여고보와 협성여자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감리교인으로 성장했고, 1931년 10월부터 경기도 천곡(川谷, 샘골, 지금의 안산시)에서 계몽운동을 하던 중, 1935년 1월23일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심훈은 최용신의 언행을 거의 각색 없이 채영신의 언행으로 서술했다고 하므로, 최용신의 활동과 고난은 <상록수>에서 읽을 수 있다. <상록수>를 완성한 심훈은 이 책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기 전, 최용신이 사망한 이듬해인 1936년 장티푸스로 병사했다.
심훈은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의 친구이자 염군사와 카프의 동지였다. 어린 시절 심훈이 수창동과 체부동의 집으로 놀러오는 일도 자주 있었던 만큼 가까웠으므로, 최승희는 심훈의 활동과 작품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십자가(1931년9월)>는 최용신의 경기도 샘골 활동(1931년10월-1935년1월) 이전의 작품이고, <상록수(1935)>보다도 이른 작품이므로, 이 작품이 최용신이나 채영신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민족 언론과 함께 개신교가 적극 참여했던 1930년대의 브나로드 운동의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추측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시기는 최승희 개인적으로도 고난의 시기였다. 리얼리즘 예술무용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조선에서 최승희무용단은 존폐의 위기 속에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십자가>는 민족의 수난이자 농촌계몽운동가들의 수난이면서, 동시에 최승희 자신의 고난이기도 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술적 형상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 팜플렛 제1집(1936)>에는 1930년대 초반의 “주요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인도인의 비애(1930)>, <광상(1931)>, <고향을 그리워하는 무리(1931)>, <고난의 길(1931)>, <희망을 안고서(1932)>, <에헤야 노아라(1933)>, <황야를 간다(1934)>, <폐허의 흔적(1934)> 등, 이 시기의 주요작품들이 나열되었지만, <십자가(1931)>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jc, 20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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