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무용단의 벌교공연 프로그램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1931년 9월1일의 제4회 경성공연의 발표작품이 대부분 상연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경성 공연에서 초연된 작품들이 이후의 지방순회공연에서 수정이나 보완을 통해 재연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제4회 경성공연의 프로그램은 3부 14연목이었고, 이중 최승희의 독무가 2작품, 최승희가 참가한 중무가 2작품, 군무가 3작품이었다. 독무 작품은 1부3번 연목인 <자유인의 춤>과 3부3번 연목인 <십자가>였고, 중무 작품은 2부1번 연목인 <인조인간(최승희, 노재신, 마돌)>과 2부3번 연목인 2인무 <철과 같은 사랑(최승희, 김민자)>이었다. 군무는 2부4번 연목인 <고난의 길>, 3부1번 연목의 <폭풍우>, 그리고 3부4번 연목인 <건설자>였다.

12월6일의 벌교 공연의 연목을 3개월 전의 경성 공연에서 유추하는 것도 정확한 추정은 아니지만, 경성공연의 작품들에 대한 해설이나 감상, 평론도 거의 발견된 것이 없다. 제4회 경성공연의 프로그램이 1931년 9월1일자 <매일신보(5면)>와 <조선일보(5면)>에 실렸지만, 작품의 제목과 무용수의 이름만 발표되었을 뿐 작품에 대한 간략한 해설조차 제공되어 있지 않다.
<매일신보>와 <조선일보>의 프로그램에는 작품의 반주음악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최승희의 작품들은 무용과 음악과 내용이 긴밀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1930년 2월1일 경성공회당의 제1회 경성공연에서 <인디언의 비애(1929)>를 1부 2연목으로 발표했다. 이 작품의 반주음악은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G장조(작품번호 100번)”의 제2악장 G단조의 라르게토(Larghetto)였다.

이 소나티나는 드보르작이 1893년 뉴욕시 체재 시절에 작곡한 실내악이다. 그는 미네소타주 미네하하 폴즈(Minnehaha Falls, Minesota)를 방문한 직후에 이 곡을 작곡했는데, 그가 접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통음악 선율이 강하게 배어있는, 느리고 차분한 곡이다.
이 곡의 2악장 라르게토의 별명이 <인디언의 비가(Indian Lament)>인데, 프릿츠 크라이슬러(Friedrich "Fritz" Kreisler, 1875–1962)가 편곡한 <인디언 비가>가 유명하며, 그중 크라이슬러가 1928년에 피아니스트 칼 람슨(Carl Lamson)과 함께 녹음한 <인디언 비가> 연주는 명연주로 꼽히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최승희가 자신의 첫 현대무용 작품 <인도인의 비애(1929)>를 창작하면서 드보르작(1893)과 크라이슬러(1928)의 <인디언의 비가>를 반주음악으로 삼은 의도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일제 강점 아래의 조선인의 처지가 백인에게 땅과 말과 역사를 빼앗기고 보호구역에 갇혀버린 아메리카 인디언의 처지와 같다는 사실이 비통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의 착각 때문에 아시아의 인도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이 혼동되어온 역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품 제목을 <인도인의 비애>라고 붙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인도인들도 1765년 무굴제국의 재정권을 동인도회사에게 강탈당했고, 1858년부터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한 이래 수탈과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자신의 작품에 <인디언의 비가>를 반주음악으로 삼고, 거기에 <인도인의 비애>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미국과 영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한꺼번에 비판하면서, 피해자인 아메리카 인디언과 아시아 인도인과 조선인들의 비통한 처지를 동시에 표현했던 것이다. 이처럼 최승희의 작품들은 그 제목과 반주음악을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경성공연에서 발표된 독무 <자유인의 춤(1931)>은 영상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의 모습을 알 수 없고, 다만 그 제목만으로 작품의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반주 음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면 작품의 의미를 더 깊이 추론할 수도 있겠지만, 최승희의 <자유인의 춤(1931)>에 대한 추가 정보는 거의 없고, 1931년 8월25일의 <조선일보(5면)>에 게재된 흐릿한 사진이 한 장 전해질 뿐이다. (jc, 20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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