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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931벌교

[최승희1931벌교공연] 17. 자유인의 춤

최승희 무용단의 벌교공연 프로그램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193191일의 제4회 경성공연의 발표작품이 대부분 상연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경성 공연에서 초연된 작품들이 이후의 지방순회공연에서 수정이나 보완을 통해 재연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4회 경성공연의 프로그램은 314연목이었고, 이중 최승희의 독무가 2작품, 최승희가 참가한 중무가 2작품, 군무가 3작품이었다. 독무 작품은 13번 연목인 <자유인의 춤>33번 연목인 <십자가>였고, 중무 작품은 21번 연목인 <인조인간(최승희, 노재신, 마돌)>23번 연목인 2인무 <철과 같은 사랑(최승희, 김민자)>이었다. 군무는 24번 연목인 <고난의 길>, 31번 연목의 <폭풍우>, 그리고 34번 연목인 <건설자>였다.

 

 

126일의 벌교 공연의 연목을 3개월 전의 경성 공연에서 유추하는 것도 정확한 추정은 아니지만, 경성공연의 작품들에 대한 해설이나 감상, 평론도 거의 발견된 것이 없다. 4회 경성공연의 프로그램이 193191일자 <매일신보(5)><조선일보(5)>에 실렸지만, 작품의 제목과 무용수의 이름만 발표되었을 뿐 작품에 대한 간략한 해설조차 제공되어 있지 않다.

 

<매일신보><조선일보>의 프로그램에는 작품의 반주음악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최승희의 작품들은 무용과 음악과 내용이 긴밀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193021일 경성공회당의 제1회 경성공연에서 <인디언의 비애(1929)>12연목으로 발표했다. 이 작품의 반주음악은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G장조(작품번호 100)”의 제2악장 G단조의 라르게토(Larghetto)였다.

 

 

이 소나티나는 드보르작이 1893년 뉴욕시 체재 시절에 작곡한 실내악이다. 그는 미네소타주 미네하하 폴즈(Minnehaha Falls, Minesota)를 방문한 직후에 이 곡을 작곡했는데, 그가 접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통음악 선율이 강하게 배어있는, 느리고 차분한 곡이다.

 

이 곡의 2악장 라르게토의 별명이 <인디언의 비가(Indian Lament)>인데, 프릿츠 크라이슬러(Friedrich "Fritz" Kreisler, 18751962)가 편곡한 <인디언 비가>가 유명하며, 그중 크라이슬러가 1928년에 피아니스트 칼 람슨(Carl Lamson)과 함께 녹음한 <인디언 비가> 연주는 명연주로 꼽히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최승희가 자신의 첫 현대무용 작품 <인도인의 비애(1929)>를 창작하면서 드보르작(1893)과 크라이슬러(1928)<인디언의 비가>를 반주음악으로 삼은 의도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일제 강점 아래의 조선인의 처지가 백인에게 땅과 말과 역사를 빼앗기고 보호구역에 갇혀버린 아메리카 인디언의 처지와 같다는 사실이 비통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의 착각 때문에 아시아의 인도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이 혼동되어온 역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품 제목을 <인도인의 비애>라고 붙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인도인들도 1765년 무굴제국의 재정권을 동인도회사에게 강탈당했고, 1858년부터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한 이래 수탈과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자신의 작품에 <인디언의 비가>를 반주음악으로 삼고, 거기에 <인도인의 비애>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미국과 영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한꺼번에 비판하면서, 피해자인 아메리카 인디언과 아시아 인도인과 조선인들의 비통한 처지를 동시에 표현했던 것이다. 이처럼 최승희의 작품들은 그 제목과 반주음악을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경성공연에서 발표된 독무 <자유인의 춤(1931)>은 영상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의 모습을 알 수 없고, 다만 그 제목만으로 작품의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반주 음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면 작품의 의미를 더 깊이 추론할 수도 있겠지만, 최승희의 <자유인의 춤(1931)>에 대한 추가 정보는 거의 없고, 1931825일의 <조선일보(5)>에 게재된 흐릿한 사진이 한 장 전해질 뿐이다. (jc, 202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