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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935다카라즈카

[다카라즈카1935공연] 5. 다카라즈카 대극장

최승희의 다카라즈카 공연이 뒤늦게 급조된 공연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극장 때문이었다.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1-2주 전에 급작히 대관할 수 있는 극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가 공연했던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19247월 개관한 4천석의 초대형 극장으로, 흔히 초대 다카라즈카 대극장으로 불린다. 이 초대 대극장은 오늘날의 2대 대극장이 1992년 무코 강변에 세워질 때까지 68년간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작품이 상연된 곳이다.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은 1913년 한큐전철회사의 창시자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가 결성한 다카라즈카 창가대(宝塚唱歌隊)’가 모태이다. 창가대는 같은 해 12다카라즈카소녀가극양성회로 개칭되었고, 191441일 첫 공연을 가졌다. 첫 공연의 극장은 다카라즈카 신온천(宝塚新溫泉)의 실내수영장을 개조한 <파라다이스 극장(500)>이었다.

 

 

19193월 고바야시 이치조는 다카라즈카소녀가극양성회의 이름을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宝塚少女歌劇団)’으로 바꾸었다. 그는 또 다카라즈카의 동쪽에 위치한 미노오(箕面)시의 공회당을 매입해 다카라즈카로 이축, 이를 <신가극장(新歌劇場, 1,500)>이라고 명명했으나, 일반인들은 이를 <공회당극장(公會堂劇場)>이라고 불렀다.

 

 

당시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은 2개조가 결성되어 있어서, 두 극장의 무대로 돌아가면서 연간 24회의 공연을 제공했다.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의 단원이 되기 위해서는 <다카라즈카 소녀가극음악학교>를 졸업해야 했는데, 상급반 학생들을 1, 하급반 학생들을 2조라고 불렀다. 1조는 주로 공회당극장에서, 2조는 주로 파라다이스극장에서 공연했다.

 

이때부터 다카라즈카의 두 극장에서는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의 단원만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규칙이 생겼고, 19211015일부터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의 1조를 하나구미(花組), 2조를 츠키구미(月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23122일 공회당극장에서 시작된 화재로 파라다이스극장까지 전소되었다. 그해 가을 파라다이스 극장(=이후 소극장)과 신가극장(이후 중극장)이 재건되었고, 19247월에는 다카라즈카 대극장이 완공되었다.

 

대극장의 개관과 함께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은 세 번째 공연조인 유키구미(雪組)를 결성, 이후 3개조가 3개의 극장에서 연간 36개의 공연을 이어가는 체제가 확립됐다. 다카라즈카의 세 극장에는 가극단원만이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규칙이 불문율로 굳어졌다.

 

 

1933년에는 호시구미(星組)가 추가로 결성됨으로써,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은 4개조의 공연단이 3개의 극장을 돌아가면서 공연을 열었고, 필요에 따라 일본내 타지방공연이나 해외공연을 단행하기도 했다. (1940년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은 이름을 다카라즈카가극단(宝塚歌劇団)으로 바꿨고, 1984년에 센카(専科), 1998년에는 소라구미(宙組)를 추가로 구성, 오늘날에는 총 6개조의 공연단이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최승희의 다카라즈카 공연이 있었던 193511월에는 4개의 공연조가 3개의 극장에서 순연하는 스케줄이 확정되어 입장권이 예매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대극장을 대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다카라즈카의 세 극장은 소녀가극단만 공연하도록 사용이 제한된다는 규칙이었다. 따라서 보통의 경우라면 최승희가 대극장을 대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이 성사되었는데, 이는 사전에 충분한 협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이 스케줄을 조정해서 최승희무용단을 특별 초대했다면 대극장 공연이 가능했을 것이고, 이 특별초대를 최승희 측이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의 초대와 최승희무용단의 수락은 적어도 오사카공연 기획이 시작되었던 19359월중순 이전에 다카라즈카 공연 기획도 함께 이루어졌을 것이고, 이후에도 이 공연을 위한 양자 사이의 협의와 조율이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jc, 2025/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