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저는 엉뚱한 생각이나 말을 자주 했다고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넌 만화를 많이 봐서 그래” 하고 핀잔을 들었지요. 그렇다고 제가 뭐 만화를 끼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책들도 읽었는데, 만화책도 책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만화책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만화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하긴 했었습니다.
그림을 보기 시작하면서 “넌 인상파만 그렇게 보냐?”하는 핀잔도 들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인상파 섹션에 자주 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또 광팬은 아닙니다. 다만 화가가 대상을 저렇게도 보거나 저렇게 그릴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곤 했는데, 그게 주로 모네나 고흐였을 뿐이죠. 다른 사람들의 그림이나 조각도 자주 봅니다.
유준 작가의 2025년 <길>전에는 설경이 많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했는데, 대작 <스키장에서(2025)>가 대표적입니다. 제목을 먼저 보면 스키를 지치는 사람들에게 먼저 눈이 가는데, 스키어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생생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유준 작가의 풍경 속 인물은 작은 편이죠. 그래서 이내 눈길이 다시 풍경으로 향하게 됩니다.
스키어들이 눈을 지치는 설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꽤 멋깔스런 봉우리가 두 개 보입니다. 오른쪽 사면은 눈이 별로 없어 짙은 암벽이나 수풀이 보이지만 왼쪽은 흰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산의 왼쪽 사면에 쌓인 눈이 제 눈길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부정형으로 구성된 면들에 묘사된 눈의 색깔이 매우 다릅니다. 왼쪽 봉우리의 꼭대기 부분이 가장 밝은 흰색인데, 여기에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그 봉우리의 오른쪽 아래는 짙은 회색의 눈입니다. 산봉우리의 그늘이 짙게 드리웠기 때문이겠습니다.
오른쪽 봉우리의 왼쪽 사면도 커다란 역삼각형의 모습으로 눈이 그려져 있죠. 그런데 그 눈의 모습들이 흰색과 밝은 회색과 어두은 회색들로 여기저기 묘사되어 있습니다. 같은 눈인데도 표현된 색감은 완전 다르더라는 거죠.
압권은, 그림을 가까이 볼 때는 그 부정형의 면들이 뭐가 뭔지 구별이 안 가지만, 5-6미터 이상 떨어져서 보면, 두 봉우리 왼쪽 사면의 눈 쌓인 모습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제가 그림을 감상해 온 편력으로는, 그게 바로 인상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모네의 수련이나 건초더미, 루앙 성당 연작을 떠올리면 바로 이해가 되실 겁니다.
구상이든 추상이든 5-6미터 이상 떨어져서 보면 얼마나 생생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모네의 화필이, 5-6미터 길이였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 적이 있죠. 만화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그러니까, 유준 화백은 유화로도 어려운 인상파 기법을 수묵으로 구사해 낸 것... 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수묵에서는 덧칠이 미덕이 아니기 때문에, 유화보다는 이런 표현법을 사용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준 화백은 그걸 해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스키장에서>의 관람 포인트가 역동적인 스키어나 여백 같은 설원이 아니라, 그 뒤편에 묘사된 봉우리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기법이고, 대단한 결과입니다.
‘인상파’라는 이름은 관람객의 인상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대상을 보고 떠올려진 작가의 심적 인상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해뜨는 인상”이라는 제목도 그렇게 붙여진 거죠. 해뜨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면 그냥 “일출(sunrise)" 하면 되는데, 그걸 보는 모네의 심상 이미지를 그렸으므로 ”해뜨는 인상(Impression, soleil levant)“이라고 한 거죠. 그래서 관람객은 ‘일출’을 보는 게 아니라 ‘모네의 해 뜨는 인상’을 보면서 이번에는 각자가 자신들의 인상을 형성해 보는 것이겠고요.
확인 삼아 유준 화백한테 물어봤습니다. 그림을 이젤 같은데 세워 놓고 작업을 하는지, 아니면 바닥에 눕혀 놓고 하는지 물었지요. 수묵의 특징상 세워 놓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묵이 흘러내리면 안되니까요. 그렇다면 작업을 하면서 눈과 화폭이 1미터 이상 떨어지기 어렵죠.
그런데도 이렇게 5-6미터 떨어져서 보아야 설경이 생생하게 도드라지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참, 모네의 화필도 5-6미터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2-30센티미터짜리들이었다고 합니다.
5-6미터 떨어져야 생생하게 보일 모습을 머리 속에 미리 상상해서 그걸 1미터 거리에서 묘사해낼 수 있는 사람들인 걸 보면, 모네든 유준이든, 천재에다가 장인인 거죠. (jc, 2025/1/30)
'유준2025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준2025길] 8. 수퍼스타(2025) (0) | 2025.02.06 |
---|---|
[유준2025길] 7. 유준 화백의 파랑 (0) | 2025.02.06 |
[유준2025길] 4. 삶(2022) (0) | 2025.02.06 |
[유준2025길] 3. 꿈(2025) (0) | 2025.02.06 |
[유준2025길] 2. 우리들의 초상(2024) (0) | 2025.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