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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2025길-홍범도

[유준2025길] 2. 우리들의 초상(2024)

유준 화백의 2025년 개인전이 <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불금과 주말에 많은 분들이 관람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좋은 인상을 받았던 작품을 관람 포인트로 하나 더 소개드립니다. <우리들의 초상(2024)>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금방 <이거, 서편제잖아?> 하실 겁니다. 아버지 유봉이, 눈멀어 지팡이를 손에 쥔 딸 송화를 새끼줄로 인도하고 있는데, 아들 동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북장단을 치며 따라옵니다. 아마도 유봉과 송화는 동호의 장단에 맞춰 번갈아 가며 소리를 매기는 중이겠지요.

 

그런데 영화 <서편제(1993)>와는 달리 <우리들의 초상>은 겨울길입니다. 사실 이번 유준 작가의 <>전에 출품된 작품들 중에 설경이 많습니다그중에서도 <서편제>의 설경은 가장 뜻밖입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때문에 서편제의 노상 소리 장면은 시절이 초봄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노래하며 지나가는 시골길의 주변은 씨를 뿌리려고 밭을 갈아두었습니다. 이 장면은 유봉과 송화와 동호가 <진도아리랑> 한곡을 다 노래하기까지 약 5분이 넘는데, 이들이 원경에 등장해서 화면 오른쪽으로 퇴장할 때까지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one take로 찍은 것으로 유명한 장면이죠.

 

 

그리고 이때는 송화가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죠. 아직 송화의 눈이 멀쩡했을 때라서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혼자서도 춤까지 춰가면서 갑니다.

 

이들이 부르는 진도아리랑 중에 유봉이 금자동이냐 옥자동이냐 둥둥 내 딸, 부지런히 소리 배워 명창이 되거라하고 매기고, 송화가 아우님 북가락에 흥을 실어 멀고 먼 소리 길을 따라 갈라요하고 받습니다. 송화가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준 화백의 <우리들의 초상>은 한겨울입니다. 산과 들은 물론 시골길이 눈에 덮여 있고 세 사람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쳐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굵은 눈까지 내리고 있네요.

 

 

결정적으로 유준 화백의 <우리들의 초상>에서는 송화가 앞을 보지 못합니다. 지팡이를 짚고 있고 유봉이 이끄는 새끼줄을 따라가고 있으니까요.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볼 수 없습니다. 동호는 송화가 눈이 멀기 전에 일행을 떠났다가, 장님이 된 송화를 찾았을 때는 유봉이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이죠. 송화가 눈이 멀었을 때 세 사람이 소리길 방랑을 함께 다닌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그림의 시간 압축... 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이나 영화는 시간 흐름에 따라 스토리를 전개해 줘야 하지만,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스토리를 한 장면에 응축할 수 있으니까요.

 

검은 외투를 입고 유봉과 송화가 앞장서서 가고 있는 것은, 다르지만 같은, 두 사람의 소리에 대한 암울한 열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동호가 두 사람과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는 것은 그의 가출과 때늦은 추적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이 그림을 보면 '~ 좋구나'하는 느낌과 함께 많은 의문이 떠오릅니다. 왜 설경일까? 이들은 어떤 가락을 노래하고 있을까?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준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왜 <우리들의 초상>이라고 붙였을까?

 

그런 질문에는 작가인 유준 화백도 정답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찬찬히 읽다보면, 눈 덮인 야산에 메아리쳐 설원에 울려 퍼지는 동호의 북소리, 그리고 유봉과 송화의 노래 가락과 함께, ...

 

'남도소리' 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청준과 이를 영상화한 임권택, 대금으로 뽑아낸 김수철과 마침내 '수묵'으로 담아낸 유준의 초상이 주마등처럼 보이는 듯 합니다.

 

그리고 감히 숟가락을 얹자면, 최승희의 조선무용을 비교적 끈질기게 추적해 온 내 자신의 여정도 어쩌면 이 <우리들의 초상>에 포함될 지도 모른다는 안도감 같은 것도 듭니다. (jc, 2025/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