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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도쿄1934공연] 31. 공연평(3) [아사히그라프]와 [요코하마그라프]

최승희의 도쿄데뷔공연 직후 신문과 잡지가 이 공연을 그다지 기사화하지 않은 것은 의외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니치니치신문(=훗날 마이니치신문)]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고, 일간신문으로는 [지지(時事)신보]의 기사가 유일하다.

 

이는 당시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조선일보]는 물론 [매일신보] 등의 한국어 신문들도 도쿄공연 전에는 더러 소개기사를 보도했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는 단 한 건의 기사도 내지 않았다.

 

 

1934922일자 [조선중앙일보(여운형)]가 유일하게 최승희의 도쿄공연 기사를 게재했지만, 이는 전날 보도된 [경성일보]의 기사를 번역해 전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행을 일명 우라카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신문][부산일보] 등의 조선에서 발행되던 다른 일본어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이 공연이 최승희의 미래뿐 아니라 일본 무용계와 조선 무용계에 미친 커다란 영향을 생각하면, 당시 언론은 지나치리만큼 조용했고,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유이한 예외가 있다면 [아사히그라프(アサヒグラフ)][요코하마그라프(横浜グラフ)]였다. 아사히신문의 사진잡지인 [아사히그라프]1934926일자의 지면에 최승희의 [바루타의 여인]의 사진을 실은 것이다. 이 사진에 붙여진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신무용계의 한 이재: 조선이 낳은 무용가이자 이시이 바쿠의 문하로서 신무용 팬에게 친숙해진 최승희의 신무용 제1회 발표회가 지난 20일 밤 일본청년관에서 열렸다. (최승희는) 조선무용 5종 등의 독무 이외에도 일반적 신무용 안무와 연기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사진은 [바루타의 여인(バルダの)>] 춤추는 최승희의 모습으로, 인도인 미망인의 심경을 표현한 특이한 무용이다.”

 

이 사진 설명에서 최승희를 이재(異才)”라고 부른 것이 주목된다. “색다른 인재라는 뜻이다. 이는 이 잡지의 같은 면과 맞은편 면에 실린 무용사진들과 비교해 보면 자명해진다. 거의 모든 다른 무용수들의 무용 사진은 천편일률적으로 일본식 복장의 일본식 무용이지만, 최승희의 무용작품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금방 현대무용이라고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시이무용단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 기사의 사진은 [바루타의 여인]의 사진으로 유일하게 공개된 사진인데, 이로써 이 작품의 무용의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인도인 미망인의 옷차림으로는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복장에 가까운 무용의상이 아닐까, 의문이 든다.

 

 

또 요코하마의 사진잡지 [요코하마그라프]1934929일자에도 최승희의 무용사진이 한 장 실렸다. 이 사진은 최승희 공연의 프로그램에도 실린 것인데, 이는 타악기 반주의 [습작A]의 사진이다. 이 사진에 덧붙여진 [요코하마 그라프]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재요코하마 조선동포 유지(有志)에 의해 조직된 애린원(愛隣園)은 스기타(衫田) 방면의 김 채취 부인들을 위해 해안에 탁아소를 건설할 계획인데, 이 자금모집에 30일 밤 개항기념회관에서 조선음악과 무용의 밤을 열었다. 오랜 역사와 유례없는 특이성을 가진 미지의 예술로 관중을 유명(幽明)의 경지로 이끌어 도연(陶然)케 했고, 특히 이시이 바쿠 문하의 준재 최승희양의 조선고곡에 의한 새로운 창작무용의 묘기는 만장의 절찬을 받았다.(사진은 춤추는 최승희양)”

 

, 최승희는 도쿄 데뷔공연(920)을 마친 뒤, 열흘 후인 930, 요코하마의 [개항기념회관]에서 [조선음악과 무용의 밤] 행사에 참여해 무용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이때 어떤 작품들이 상연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도 도쿄 공연에서 발표한 작품들을 발췌했을 것이고, 그중에는 조선무용이 대부분이었던 한편, 아마도 호평을 받은 [습작A]도 발표에 포함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jc, 2024/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