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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도쿄1934공연] 30. 공연평(2) [지지(時事)신보]

[니치니치신문][아사히신문] 등이 최승희의 공연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았던 반면, 도쿄의 일간신문 중에서는 [지지신보]가 최승희 공연을 가장 빨리 보도했다.

 

 

923일자 [지지신보(7)]에 실린 최승희의 초무대(崔承喜初舞臺)”라는 제목의 박스 기사는 공연에 대한 사실 보도라기 보다는 평론의 형식이고, 필자는 영전생(永田生)으로 되어있다. 이는 평론자의 이름이 니가타 오사무라는 뜻인지, 혹은 니가타(永田) 태생()의 익명의 평론자라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평론 기사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이시이 바쿠 문하의 여성무용가 최승희가 도쿄에서 개최한 제1회 무용공연(20, 일본청년관), 밤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극장에 넘치는 관중을 얻은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극장에 넘치는 관중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은 관객의 면에서도 성황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극장에 가득 찼다는 뜻이므로, 일본청년관의 객석 정원 2천명을 모두 채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밤늦은 시간은 일본의 시간대 때문이다. 당시에도 조선과 일본은 같은 시간대를 사용했는데, 서울과 도쿄의 경도 차이가 약 12도이므로 일출과 일몰 시간이 약 50분 정도 차이난다.

 

따라서 920일 경에는 서울의 일몰 시간이 630분으로 황혼의 여명이 남아 있는 시간이지만, 도쿄는 그보다 50분 이른 540분경에 해가 지므로 630분이면 이미 캄캄해 진 다음이다. 더구나 공연이 10시경에 끝났다고 하므로 도쿄는 이미 깊은 밤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지지신보>는 최승희 공연의 각 부별 연목을 선별적으로 평가했는데, 우선 제1부의 현대무용 연목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1부에서 [황야를 가다], [폐허의 흔적], [체념]의 독무 중, 이시이 바쿠가 10년 전에 안무했다는 [체념]은 뛰어난 춤으로, 차분한 상징이자 일점의 사악이나 자만의 기운이 없이, 그윽하면서 맑고 높으면서도 상쾌하여(幽清高爽), 매우 좋다.

 

1부의 총평으로 최승희의 작품들 보다 이시이 바쿠의 [체념(あきらめ)]을 높이 평가한 것이 특이하다. 하지만 [체념]의 실연자도 최승희였으므로, 스승 이시이 바쿠의 뛰어난작품을 제자 최승희가 일점의 사악이나 자문의 기운이 없이 그윽하면서 맑고, 높으면서도 상쾌하게발표했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평론자는 제2부에서 발표된 조선무용 5작품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자태미와 운동미활발하면서도 상쾌하게 전개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또 이 같은 작품을 안무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범한 재능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2[검무], [에헤야노아라], [승무] 및 군무인 [영산무], [마을의 풍작]은 모두 제각기 조선 향토무용을 새롭게 고안 창작한 것으로, 자태미와 운동미를 활발하면서도 상쾌하게 전개한 것은 평범한 재능이 아니다. [검무][승무]도 매우 좋았고, [영산무]에 이르러서는 3인무 형식으로 가벼우면서도 미묘한 옷소매, 끊임없이 면면히 이어지는 그윽하고 맑은 향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평론자는 특히 3인무인 [영산무]를 따로 거명하면서, “그윽하고 맑은 향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며 극찬했는데, 특히 무용수들의 의상 중에서 옷소매가 가벼우면서도 미묘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편 평론자의 제3부의 현대무용에 대한 총평은 다음과 같았다.

 

3부에서는 [바루타의 여인], [습작]과 함께 오바타 토시카즈(小畑敏一)군의 조명이 뛰어났고, 특히 그가 진홍색의 광색을 가지고 수많은 무대 색채를 구사한 것이야말로 참으로 고상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었으므로, 종횡무애하게 조명을 다루는 솜씨를 발휘해 온 그에게 무량의 감탄을 하게 된다, 이렇게 뛰어난데도 아직 나이가 어린 편이므로 명리에 미진하다고 평가하기는 이르다.”

 

평론자는 [바루타의 여인][습작]이 뛰어났다고 지적했는데, 특히 이 작품들을 돋보이게 한 오바타 토시카즈의 조명을 칭찬한 것이 참신했다. 춤 동작과 함께 조명을 칭찬한 것은 무용 의상에 대한 칭찬도 포함하게 된다. 조명은 무대뿐 아니라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의상에 가해지면서 다색다기한 색채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이 공연에서 조명을 담당한 오바타 토시카즈는 당대의 뛰어난 조명 전문가였다. 19314월에 발행된 [영화과학연구(映画科学研究) 8]간다(神田) 니카츠칸(日活館) 무대조명에 대하여라는 글을 게재하는 등,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탁월한 조명 전문가였던 것이다.

 

오바타 토시카즈는 후일 영화 제작자로도 활동 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인형극 영화인 [맥주의 옛날 옛적(ビールむかしむかし, 1956.7., 덴츠(電通)영화사)], 다큐멘터리 [태평양전쟁의 기록(太平洋戦争記録, 1956.8., 다이에이(大映)][카츠라 리큐(桂離宮, 1959.6., 덴츠(電通)영화사 제작, 다이에이(大映)영화사 배급]의 세 편이 있다.

 

평론자는 또 최승희의 실험적 작품인 [습작]에 대해서도 한 문단을 할애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최승희의 [습작]은 타악기 반주로 극히 이색적인 안무로, A보다는 B가 더 흥미롭지만, 필자는 A에서 진솔함을 본다. B에는 일말의 퇴폐의 감정이 있는데, 이는 보덴위젤 무용단 등의 네덜란드인이 갖는 육식적 퇴폐의 맛과 공통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서술에서 보덴위젤 무용단이 어떤 무용단인지, 어째서 네덜란드인(=紅毛人)이 등장한 것인지, 또 육식적 퇴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등은 알 수 없지만, 필자(=永田生, 나가타 오사무)의 의도는 최승희의 타악기 반주의 독무 [습작A]가 진솔하게 느껴진 반면, 무음악의 2인무 [습작B]에서는 퇴폐의 맛이 느껴진다고 고백한 것이다.

 

1930년대는 대중문화가 에로그로난센스로 요약되는 시대였으므로, “퇴폐적이라는 말은 에로틱(erotic)”하거나 그로테스크(grotesque)”하거나 난센스(non-sense)”인 경우일 것이다. [습작B]는 무음악 무용으로 최승희가 남성역, 시노 히사코(紫野久子)가 여성역을 담당한 2인무였을 것이므로, 이 작품이 그로테스크난센스의 분위기를 띄었을 리는 없고, 아마도 평론자는 이 작품에서 에로의 느낌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끝으로 평론자는 최승희 무용의 단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최승희의 무용에 완성되지 못한 미비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녀의 큰 느낌의 무용 속에는, 섬세한 감동을 담아내는 기교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승희와 같은 육체를 가진 여성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일 지도 모른다. 최승희와는 조건이 다른 여성 무용가들도 대부분 소박한 춤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최승희의 열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녀는 훈련을 거듭하면서 이러한 기술도 터득할 것으로 기대된다. [永田生]

 

요컨대, 최승희의 크고 대범한 춤사위가 장점이긴 하지만, 세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평론자는, 부단히 노력하는 최승희의 열정으로 미루어, 이같은 단점도 이내 극복될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지지신보]의 평론자가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을 초무대(初舞臺)”라고 지적한 것이 의외일 수 있다. 최승희는 1926612,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공회당에서 <그로테스크>로 생애 초무대를 경험했고, 그해 622, 도쿄 호가쿠자에서 <물고기춤>으로 도쿄 초무대에 올랐다.

 

또 최승희는 이시이무용단의 연구생이던 19271015, 경성공회당에서 <세레나데>로 조선 초무대를 밟았고, 이후 193021일에는 이시이무용단에서 탈퇴한 뒤 독자적으로 설립한 <최승희무용연구소> 주최로 제1회무용발표회를 개최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1934920일의 도쿄 데뷔공연은, 스승 이시이 바쿠의 허락아래, 정식으로 독립 무용가로 인정받는 첫 번째 공연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지지신보]의 평론자는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을 [초무대]라고 불렀던 것으로 짐작된다. (jc, 2024/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