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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도쿄1934공연] 17. 공연1부(5) 체념

최승희 도쿄 데뷔공연의 15번째 연목은 <체념(諦念, あきらめ)>이었다. 프로그램에는 이 두 작품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었다.

 

5. 체념(あきらめ)... (안무...이시이 바쿠)... 그리그 곡, 최승희

10년 전의 작품. 체념의 기분을 완전히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이번에 최승희에 의해 재연되는 것이 기쁘다. (이시이 바쿠)

 

 

<체념>은 이시이 바쿠의 작품이었고, 스승의 지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최승희가 데뷔 공연에서 상연하기로 선택한 작품이다. 이시이 바쿠는 <나의 얼굴(1940)>에서 “18년 동안 2백 수십곡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서술했다. 2백곡이 넘는 스승의 작품 중에서 최승희는 어째서 그리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던 <체념>을 선택했던 것일까?

 

이시이 바쿠는 이 작품을 체념의 기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새출발하는 최승희에게는 체념은 어울리지 않았고, 스승의 초기 작품을 선택한 것도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0년 전의 작품이라는 말에 실마리가 있다. 19277월에 발행된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에 게재된 이시이 바쿠의 작품목록에는 <체념>1925년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시이 바쿠가 지유가오카(自由)로 근거지를 옮기기 전이었고, 19244월 세계 순회공연에서 돌아와 무사시노(武藏野)에 첫 무용연구소를 개설했던 시기였다.

 

최승희는 19264월에 도쿄 유학을 시작했으므로, 이 작품이 창작되는 과정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1926622일 호가쿠자(邦樂座)에서 열린 <이시이바쿠 제3회신작발표공연>192773일 도쿄 아사히강당(朝日講堂)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 무용발표회> 등에 참여하면서 <체념>이 상연되는 것을 목격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최승희가 <체념>을 처음 관람한 곳은 도쿄가 아니라 경성이었다. 1926323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이시이무용단의 공연이었다. 1926324일자 <경성일보(2)>는 이날 공연에 <아키라메(あきらめ)>가 포함되었다고 보도했고, 최승희는 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이 공연을 관람했다. 최승희는 자신이 처음 관람했던 스승의 작품을 재연하기로 한 것이다.

 

 

192635일 다롄(大連)에서 시작해 그해 329일 부산에서 끝난 이시이무용단의 만주-조선 순회공연에서 <체념>은 거의 상연되지 않았다. 192635일자 <만주니치니치(滿洲日日)신문>에 발표된 만주 순회공연 레퍼토리에는 <체념>이 포함되지 않았고, 인천(324)과 대구(326), 부산(328-29) 공연에서도 <체념>이 상연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체념>상연이 기록에 남은 것은 경성 3일째 공연뿐이었다. 아마도 3일 동안 계속된 경성 공연에서 같은 연목을 반복 공연하는 것을 꺼린 이시이 바쿠가, 3일째 공연의 연목을 대폭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 공연에는 다른 공연에서 거의 상연되지 않았던 <노을(たそがれ)>, <기묘(奇妙)>, <헤브라이의 멜로디(ヘブライのメロデー)><체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날 공연의 연목 중에서 여성 무용수의 독무 작품으로 <체념> 이외에도 <꿈꾸다(みる)><솔베이지의 노래>, <노을><헤브라이 멜로디> 등이 포함되었다. 그중에서 최승희가 <체념>을 데뷔공연을 위한 스승의 작품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26323일자 <경성일보(조간3)>무용시 <단념(斷念)>”무용의 전도(前途)를 암시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이 기사는 <아키라메><단념>이라고 번역했지만, <체념>이 더 적절한 말이다. ‘단념은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가졌던 생각을 포기하는 부정적인 뜻이지만, 체념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과거의 생각을 버린다는 긍정적인 뜻이기 때문이다.

 

 

신무용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한 최승희에게는, 도쿄 데뷔공연을 위한 스승의 작품으로 <체념>만큼 적절한 주제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이시이 바쿠는 <체념이> “이번에 최승희에 의해 재연되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jc, 2024/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