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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야기

[마르세유1939공연] 13. <르 라디칼>의 기사

최승희의 도착을 보도한 4개의 마르세이유 일간지 중에서 <르 라디칼 드 마르세유(Le Radical de Marseille, 3)>가 가장 긴 기사를 보도했다. “극동의 가장 위대한 무용가 최승희와의 대담이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였다. 외젠 에스카비(Eug ESCAVY)가 필자로 명시된 이 기사를 완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일(31) 밤 시립오페라극장에서 열리는 리사이틀의 서막으로, 어제(227) 마실리아 살롱에서는, 마르세유 주재 일본 총영사 다카와 씨 부처가 극동 최고의 무용가이자 한국 최고의 미인최승희씨를 언론에 소개했다.

 

이 여성에게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동양적인 얼굴보다 그녀의 두 손이다. 그녀의 손은 매우 얇고 아주 길다. 그 두 손은 특별한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느껴지는데, 막 날아가려는 두 마리의 흰 새를 연상시킨다.

 

최승희씨는 (프랑스어를 못한다며) 영어로 말하지만, 우리 언어를 꽤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어떻든 그녀의 표현력이 뛰어난 눈과 특히 그녀의 희고 가는 손은 그녀의 모자란 말을 대신한다. 또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든, 그녀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이든, 그녀가 환대를 받았던 파리 사교계의 이야기이든, 이 젊고 아름다운 조선여성과의 대화는 매우 매력적이다.

 

몇 주 전, 파리를 처음 방문한 최승희는 그녀의 고국의 전통 무용을 처음으로 소개해 파리를 정복했다. 20세기 역사를 가진 그녀의 무용을 이번에는 우리가 감상할 차례이다.

 

소명(Vocation)

 

최승희는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유서 깊은 가문에 태어났다. 그녀는 일본의 유명한 무용예술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다. 그때 그녀는 15세였다. 여성 해방이 제법 진전된 일본에서조차 무용은 천한 기생의 직업으로 인식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부르주아 교육을 받은 딸이 무용을 하겠다고 나서자 그녀의 가족은 경악했다.

 

최승희는 자신의 결심을 지키면서 가족의 반대를 돌파했다. 도쿄에서 그녀는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가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최승희는 마을에서 마을로 방방곡곡 방문하면서 농악 무용과 축제 무용, 종교 무용 등을 연구했다. 그녀는 거의 잊혀져버린 조선의 무용 전통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무용예술 작품들에 대한 증언을 듣고 시연을 보았다. 그 결과 그녀는 새롭고 독창적이면서도 매우 예술적인 레퍼토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일본에서 발표했을 때 즉각 대성공을 거두었다.

 

조선무용의 대사(Ambassadrice de la danse coreenne)

 

하지만 최승희의 야망은 더 컸다. 그녀는 고국의 무용을 해외에 알리고 싶었고, 그래서 이 최고(最古)의 예술이자 가장 우아한 예술인 조선무용의 홍보대사가 되었다.

 

그녀는 자전적 무용영화 <반도의 무희(1936)><대금강산보(1938)>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후, 아메리카 순회공연을 떠났고 그곳에서 격찬을 받았다. 그녀는 곧바로 유럽 순회공연을 결정했고, 파리에 이어 칸에서 공연한 다음, 이제 마르세유를 방문한 것이다.

 

이상이 최승희 이야기이다. 그녀의 말은 간결했고 통역을 통해 우아한 미소와 함께 전달되었다. 그리고 고국의 키모노를 입은(dans son kimono national) 그녀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내일 밤, 최승희는 독창적인 무용의상 차림으로, 고국의 시와 그림 같은 풍경을 이야기할 것이다. 외젠 에스카비(Eug ESCAVY)

 

 

외젠 에스카비는 1928-1934년 사이에 <르 라디칼 드 보쿨뤼즈(Le Radical de Vaucluse)97건 이상의 탐사보도문을 기고한 주요 필진이었다. 그는 마르세유에 거주하면서 보쿨뤼즈의 특파원 역할을 담당했는데, 1935년부터는 마르세유의 주요 일간지에도 자주 기고한 것이 확인됐다. 최승희 인터뷰 기사도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jc, 2024/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