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 화백의 [묵의 사유] 전시회가 끝났습니다. 2주 동안의 축제가 성황을 이룬 것은 작가의 노력과 관람자들의 찬탄 덕분이겠습니다만, 전시와 접대^^에 만전을 다하신 혜화아트센터의 노력도 돋보였습니다.
문외한인 저도 전시를 보면서 생각이 많이 일더군요. 대부분은 미친 범주에 들기 때문에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그중 한 가지만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작년 [화양연화] 때도 그랬고, 올해의 [묵의 사유] 전에서도 유준 화백은 개막식 인사말에서 “수묵화가 그리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던데, 그 말이 맴돕니다. 저야 화단 사정을 모르고 현역 화가라야 유준 작가 밖에 모르니까,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었습니다.
수묵화는 연원이 길죠. 한국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수묵화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화가나 연대가 알려진 작품은 남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일본 교토의 쇼코쿠지(相國寺)에 소장된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를 고려시대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합니다.
연대와 화가가 알려진 최초의 한국 수묵화는 조선시대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1447)>입니다. 중국의 북송~명나라 시기의 수묵화 기법이 나타나기 때문에 한국 수묵화가 중국의 영향으로 발전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도 임진왜란 때 약탈당해 일본 나라현의 덴리(天理)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작년 12월 한국에 영구 반환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한 일이죠.
18세기 들어서 한국 산수의 특징을 표현하는 데에 효과적인 새로운 기법들이 창안됐습니다. 정선(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 1751)」와 「금강전도(金剛全圖, 1734)」 등이 그런 작품인데, 이후 조선식 수묵 기법이 활발하게 발전되고 작품들도 이어집니다.
그렇죠. 중국과 한국의 풍광이 다른데, 다른 화법이 개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오히려 3백여년 동안 중국 화법을 답습만 했다는 게 이상할 정도니까요.
19세기에는 서양화가 유입되면서 수묵화는 화가와 소장가, 그리고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서양화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유준 화백이 개인전 개막식에서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닌데도 이렇게 관심을 표명해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수묵화는 그림 소재에 따라 15가지 정도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유준 화백의 이번 개인전에도 산수+인물과 함께 용과 호랑이, 고래와 물고기, 멍멍이와 고양이, 참새와 병아리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문득, 이 동물들을 데려와서 유준 작가의 그림들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의 소재가 된 동물들이 감상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흥미로워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인물화나 초상화를 즐겁게 감상하듯 말입니다.
물론 용이나 호랑이를 <혜화아트센터>에 데리고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죠. 화랑을 거대한 수영장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고래나 물고기가 유준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고, 작품들도 전부 망가지겠습니다. 전시회장에 새들이 날아다니면 정신 사납겠지요.
하지만 댕댕이와 냥이들은 어떨까요? 동물들은 색을 보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동물 연구에 따르면 고양이와 개들도 노란색과 파란색, 녹색 등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다만 붉은색을 알아보지 못할 뿐으로, 적록색맹인 거죠. 그러니까 멍냥이들도 대부분의 수묵화는 물론 <우도의 봄>이나 <파로호의 밤>같은 담채화도 사람과 똑같이 감상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댕댕이들은 2-3미터, 냥이들은 5-6미터를 벗어나면 형체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림은 그 정도 거리에서 관람하잖습니까? 반려동물과 함께 그림을 감상하기에는 수묵화 전시회가 딱입니다.
그래서 유준 화백의 다음 전시회에서는 한 주말쯤 반려동물과 함께 감상하는 날을 정해보면 어떨까요? 물론 다른 관람객에 방해되지 않도록 짧은 안전 목줄도 하고, 부모가 품에 안고서 관람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이죠. 해외토픽감일텐데, 재미있지 않을까요?^^ (jc, 202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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