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 작가의 <묵의 사유>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11시부터 개막인데 11시15분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그 시간에 아무도 없죠. 심지어 전시주인 유준 선생도 아직 안 나오셨습니다.^^
데스크 지키시는 분이 방명록 사 가지고 들어오신다고 전해 주시네요. 이분이 바로 어제 저더러 "내일부터예욧!"하신 분입니다. 제가 워낙 평범하게 생겨 가지고^^ 저를 기억하기가 매우 어려우셨을 텐데, 그래도 기억하시더라고요. 어리버리한 태도와 표정 때문일 겁니다.ㅋ
유준 선생은 제가 1시간 반 동안 작품을 다 보고 나올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시네요. 틀림없이 "금요일 오전에 누가 오겠어?" 하면서 낮술 한잔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저는 전시회 첫 관람자이면서도 방명록에 이름을 못썼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대한 제 “첫 인상”은 "여전히 혼자"와 "개보다 고양이"의 두 가지입니다. 유준 작가 수묵화에는 당연히 사람이 등장하지만, 대개 한 사람만 그려져 있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본 두 번의 이전 전시회에서도 익히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번 전시회도 예외가 아니네요. (두 번의 전시회란 2023년 1월의 <화양연화>와 11월의 <묵향>전을 가리킵니다.^^)
물론 누구나 한 사람만 그릴 수 있죠. 초상화나 자화상 같은 그림은 원래 한 사람만 그리는 거니까요. 예컨대 르느와르나 고흐도 자화상을 꽤 그렸죠. 이런 자화상은 한 사람으로 화폭을 가득 채웁니다. 그런데 유준 작가처럼 커다란 풍경 화폭에 개미만한 사람 하나 그려서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감성을 열 배로 울립니다. 종류가 다르잖습니까?
(죄송합니다. 고흐나 르느와르 같은 부류를 감히 유준 작가님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큰 실례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워낙 제가 표현력이 모자라서...ㅠ.ㅠ)
아, 참, 초상화 이야기가 나오니까, 유준 작가의 전시회가 또 하나 생각나는군요. 5월에 같은 자리에서 열렸던 <사람 사는 세상> 전시회입니다. 여기에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그림이 다수 등장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준 선생도 수묵 인물화, 초상화를 아주 잘 하십니다.
그러나 유준 선생의 풍경 속의 인물은 완전히 다릅니다. 화폭이 크든 작든, 내용이 산수든 도시든, 그 속에 아주 작은 사람이 한 명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한 명의 사람 때문에 그림 전체가 달라집니다.
이번 전시회에도 그런 그림이 많습니다. 기차가 설원을 달리는데 눈길을 걸어가는 일인, 백척 폭포가 떨어지는데 그 아래서 고기 잡는 일인, 태산을 다 올라와서 마지막 봉우리를 올려다보는 일인, 도시의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일인.... 다들 혼자입니다.
등산복과 백팩, 그물과 투망, 옆구리에 낀 가방이나 등에 둘러멘 책보 등의 한두 가지 소품을 빼면 디테일도 별로 없는데도, 그 작은 인물을 그리려고 주변의 넓은 배경을 그린 것 같습니다. 쬐그맣지만 흡인력이 강한 인물인 것이지요. 그 한 명의 인물을 빼버린 그림을 애써 상상해 보면 그냥 밋밋한 그림이 되고 맙니다.
예컨대 이번 전시회에 폭포 그림이 두 개인데, 그중 하나가 <墨의 思惟>입니다. 이번 전시회의 타이틀 작품이죠. 그런데 이 그림에서 폭포 옆에 뜬 조각배 위에서 그물을 만지고 있는 성냥개비 같은 한 사람을 빼버렸다면 탄성이 나올까요? 그냥 이쁜 산수화일 뿐이겠죠.
혼자 있는다는 느낌과 의미를 나름 이해한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유준 작가의 작품에 홀딱 빠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혼자 있는 것(being alone)의 즐거움과 외로움을 살짝 숨기는 편인데, 유준 작가는 작품 할 때마다 이렇게 드러내고 마네요.ㅋ
그런데, 이런 “여전히 혼자”의 작품들이 무슨 뜻일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작가가 외롭다"는 표현인지, "인간은 원래 외로운 거야"라는 존재론적 메시지인지, 혹은 "까딱하면 이렇게 되는 수가 있으니 각자 조심하자"는 경고인지는, 보시는 분들의 느낌에 달린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jc, 202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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