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 작가 <묵의 사유>전에 전시된 <밤(2023)>을 볼 때마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첫날 보았을 때는, 제목이 없어서 그랬는지, 데자뷔 느낌이 아주 강했지요.
제목이 <밤>인 것을 알고부터 약간 둔화되기는 했습니다. 어째서 오밤중에 고기를 잡는 거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가 떠오르려면 ‘이상한 점’이 없어야 하거든요. 그러나 첫 인상이 워낙 강해서인지 "어디서 봤더라?"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그게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었을 때 받았던 느낌과 유사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Big Two-Hearted River(1925)>라는 작품인데, 그리 긴 작품은 아닙니다. 미국식으로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쫌 길고, 중편이라고 하기에는 짧은 작품인데, 이 작품의 2부에 주인공 닉이 플라이 낚시(Fly Fishing)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닉이 낚시를 가면서 점심으로 양파 샌드위치(sliced onion sandwiches)를 싸는 장면을 읽으면서 '으잉? 생양파만으로 샌드위치를? 하고 흠칫 놀랐던 기억도 납니다.ㅋ)
소설의 플라이 낚시와 그림의 투망이 어째서 비슷한 느낌으로 겹쳤던 것인지는 없는 며느리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단지 물고기를 잡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닌 듯한데요. 게다가 헤밍웨이의 플라이 낚시는 대낮(아침나절인가?)이었지만, 유준 선생의 투망은 달이 뜬 밤인데, ...
어쩌면 낚시꾼과 투망꾼의 외롭지만 당당한 모습과 고기잡이에 몰입한 차분한 침잠의 느낌이 비슷했던 것일까?... 하고 짐작을 해 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혹시?’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유준 화백이 플라이 낚시 그림을 그렸었다는 기억에 떠올랐습니다. 작년에 찍어 둔 <화양연화>전의 사진들을 찾아봤습니다. 역시, ... <흐르는 강물처럼(2022)>이 있더군요.
그뿐 아니네요. 유준 선생의 화첩일기에는 제목이 없는 투망 그림도 있었습니다. <밤(2023)>과 비슷한 구도이긴 한데, 시간이 해질 무렵의 바다라는 점, 그리고 배를 타지 않고 물속에 서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등, 디테일이 다르기는 한데, 투망이라는 주제는 같습니다.
(이런 그물을 ‘투망(投網)’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식 한자어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고, 한국어에서는 이런 그물을 ‘좽이,’ 좽이를 던져 물고기를 잡는 일을 ‘좽이질’이라고 합니다.^^)
암튼, 그래서 2022년의 <흐르는 강물처럼>과 화첩일기의 좽이질 그림이 <밤(2023)>으로 종합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표현은 소스가 둘입니다. 미국 작가 노만 맥클린(Norman Fitzroy Maclean, 1902-1990)의 자전적 소설 <강물이 관통한다(A River Runs Through It, 1976)>가 맥클린 사망 직후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이 영화가 한국에 배급될 때 제목을 <흐르는 강물처럼(1992)>이라고 붙였더군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만 맥클린이 플라이 낚시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요약하는 클로징 멘트를 하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졌고, 그것을 강물이 관통한다.” 영어 제목은 여기서 나온 것인데, 한국어 제목은 약간 모호하지만 이해할만한 표현이긴 하죠.
더 중요한 것은 노무현(1946-2009) 대통령의 어록입니다. 임기를 마친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4월 노사모 자원봉사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방명록에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물처럼!”이라고 썼습니다.
역사 유지는 원래 엘리트들의 일이지만, 한국 현대사에서는 엘리트가 개판치는 동안 민중이 역사를 이끌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중에게 역사를 포기하지 말도록 당부한 것이지요.
유준 선생은 맥클린과 노무현을 합쳐서 <흐르는 강물처럼(2022)>과 <밤(2023)>을 그리신 것같습니다. 일 년 만에 플라이 낚시가 좽이질로, 낮이 밤으로 바뀐 것은, 한 번의 잘못된 선거 때문에, 역사를 건지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jc, 202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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