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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야기

[마르세유1939공연] 9. 급행과 특급

한국어에서는 기차열차의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이는 원래 서로 다른 말이다. 중국과 일본은 한국과 비슷한 시기, 혹은 더 이른 시기에 기차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오늘날에는 열차가 표준어이고, ‘기차는 구어법의 잔재, 혹은 잘못된 어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언중은 기차(汽車)증기()로 가는 차임을 잊을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중국인과 일본인은 푸싱호(复兴号)나 신칸센(新幹線)기차라고 부를 수가 없다.

 

 

그러나 한자를 폐기한 한국어에서는 기차라는 표기에서 증기의 어원적 흔적이 비교적 쉽게 지워질 수 있고, 외형적 특징을 가리키는 열차라는 말과 쉽게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기차라는 시니피에가 증기로 가는 차라는 어원적 시니피앙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열차의 등급을 가리키는 한국어 급행특급이라는 낱말은 시니피에와 시니피앙과 더욱 밀착된 예이다. 열차를 구분할 때 급행(急行)과 특급(特級)을 구별하는데, 둘 다 보통(普通)열차보다 빠르다. 빠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된다. 빠른 동력을 사용하거나 정차역을 줄인다. 장거리 열차에서는 두 방법을 모두 사용한다.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살인(The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1934)>의 한국어 제목에서 특급은 엄격히 말해 오역이다. 서양어 익스프레스에 맞는 번역어는 급행이기 때문이다. 일본어에서는 <오리엔트 큐코노사츠진(オリエント急行殺人)>이라고 번역했다. ‘특급이 아니라 급행이라고 직역했다.

 

 

특급은 특별급행의 준말로 서양어 리미티드 익스프레스(Limited Express)의 번역어이다. ‘리미티드란 정차역의 수가 제한되었기(Limited) 때문이다. 정차역을 줄이는 것은 운행시간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고속열차일수록 정차 시간뿐 아니라 정차와 재출발을 위한 서행 시간이 운행 시간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급은 급행보다 정차역을 더 줄인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1974)>에서 열차 출발 직전의 안내방송에 따르면 이 기차가 이스탄불을 출발해서 12개 역에 정차한 후 칼레에 도착한다고 했다. 2,740킬로미터를 달리면서 평균 2Km마다 한 번씩 정차한 것이다. 정차역이 이처럼 극도로 제한되었으므로 이름은 급행이지만 실제로는 특급열차였던 것이다.

 

 

1899년에 개통된 경인선의 속도가 20Km/h였다. 기차가 그리 느리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모르는 말이다. 성인의 걸음이 4Km/h이다. 인천에서 한양 가는데 10시간, 여름에는 하루 종일, 겨울에는 12일이 걸렸다. 경인선은 한양-인천 사이의 이동 시간을 2시간으로 줄었다.

 

<오리엔트 익스프레스>1883년 개통 당시의 속도는 40km/h였다. 경인선보다 15년 전인데도 속도가 2배였다. 그래서 익스프레스,’ 급행이었다. 50년이 지난 1930년 말경에는 오리엔트 급행의 속도는 100km/h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라고 불렸다.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미 당시 기준으로 특급(Limited Express)’이었던 것이다.

 

 

1934년 아가사 크리스티가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살인>을 출판했을 때, 일본어에서는 당시 상황을 무시한 채 급행이라고 직역한 반면, 한국어에서는 특급이라고 의역한 것이다.

 

 

최승희가 탑승했던 <르 트랑 블루(Le Train Bleu)>도 급행 열차였다. 1892년에 발행된 르 트랑 블루의 열차 시간표에 따르면 밤 1047분에 칼레에서 출발, 파리(23:40), 리용(다음날 아침 8:49), 마르세유(14:25), (18:18), 니스(19:00), 몬테 카를로(19:37), 망통(20:14)에만 정차한 후 이탈리아의 벤티미글리아에 밤836분에 도착했다. 1,210Km를 약 22시간에 달렸으니까 약 150Km에 한 번씩 정차한 셈이었다. 1892년의 속도가 55Km/h였으니까 급행이 맞다.

 

 

그러나 최승희가 <르 트랑 블루>를 탔던 1939년에는 같은 구간을 12시간에 주파했으니, 시속 100킬로미터를 넘겼다. 그런데도 유럽에서는 여전히 익스프레스라고 불렀고, 일본에서도 급행이라고 번역했지만, 한국에서는 이를 특급이라고 번역했던 것이다. (jc, 202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