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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2023강연

[강릉2023강연] 5. 연고지 조사

저는 정홍영 선생과 콘도 도미오 선생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을 존경하고, 두 분이 나누신 활동과 우정이 부럽고, 그분들의 족적을 따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두 분은 서로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 균형적이고 올바른 시각을 유지하셨고, 교류했던 사람들과 속했던 사회에 잔잔하지만 강한 영향력을 미치셨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은 나의 일본 조사가 시작되기 전 2000년에 타계하셨으므로 기회가 없었지만,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는 sns로나마 인사드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콘도 선생은 내 최승희 조사연구를 도와주셨고, 우리학교 무용부 후원에 기꺼이 참여하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은 단톡방에서도 과묵하셨고, 개인적인 문자를 보내신 적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내가 개인 문자로 질문을 드리는 경우에도 대개 단톡방에 대답하시곤 했습니다.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의논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콘도 도미오 선생께서 개인적인 문자를 보내신 적이 한 번 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을 마치신 후에, 5인의 조선인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찾아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제가 7-80년 전의 최승희 선생 관련 자료를 발굴하는 것을 보시고, 조선인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짐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은 추도비 건립 전에도 희생자들의 연고지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신 적이 있으셨지만, 성과는 없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을 대신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신 것인데, 그 부탁은 정중하고 부드러웠지만 제게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느껴졌습니다.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승희 선생은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워낙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여러 매체에 많은 자료가 보도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사전 조사를 통해 그 자료들을 발굴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의 조사는 어렵습니다. 그분들이 언론이나 공문서에 등장한 것은 그분들이 당하신 불행한 사건 때문이었고, 그밖에는 다른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기록이 있다 해도 대한제국시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던 시기의 조선의 공식 기록은 불완전한 것이 많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찾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부탁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20205월부터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를 읽고, 두 분이 발굴하신 자료를 검토했습니다. 한국의 근세 지도들을 참고하고 1914년 단행된 행정구역 변경 내역도 연구했습니다.

 

약 10개월의 리서치 끝에 2021년 3월 김병순씨가 강릉 출신임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본적 주소를 해독하고, 이를 경주김씨 수은공파의 족보 기록과 대조해서 김병순씨가 강릉 북일리면 대천동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강릉 조사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전공하신 박한용 선생과 아미원의 전문갑 선생이 강릉 첫 리서치를 위한 자문과 연락처를 마련해 주셨고, 강릉에서는 홍진선, 강승호, 유선기 선생 등이 협력해 주셨습니다. 김병순씨의 족보 조사를 위해서는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지회의 김자정 회장과 김철욱 지원으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편 다른 희생자 조사에서도 윤길문, 오이근씨가 경상남도 고성, 남익삼씨가 경상남도 통영 출신임을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차 검증을 통해 확인하기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성과 통영 조사가 진전을 이룬 것은 고성군청의 학예사 김상민 선생과 고성방송국 사장 한창식 선생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콘도 도미오 선생께 알려드렸고, 콘도 선생님은 기뻐하셨습니다. 나도 이 리서치의 일부나마 성공한 것에 보람을 느꼈지만, 그 보람의 대부분은 콘도 도미오 선생과 정홍영 선생의 족적을 따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jc, 2023/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