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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2023취재

[도호쿠2023취재] 42. 최승희 탄생일 (7) 호적에서 민적으로

7. 호적에서 민적으로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 19111224일이라면, 최승희의 호적기록이 오류라는 결론이 불가피하다. , 부친 최준현의 호적에 기록된 1124일이라는 최승희의 생일은 1224일의 잘못이다. 이 오류는 조선의 호적이 일제의 민적으로 변경되면서 발생한 오류였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적 기록을 시작한 것은 강점이 이뤄지기도 전, 즉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던 19094월부터였다. 통감부는 19093월 법률 제8호로 <민적법>을 공포, 4월부터 이를 시행하면서 출생, 사망, 호주변경, 혼인, 이혼, 양자, 파양, 분가, 일가창립, 입가, 폐가, 페절가재흥, 부적, 이거, 개명등의 15개 사항을 기입하도록 했고, 신고 의무자는 호주였다.

 

일제 강점 이전에 조선의 호적에 입적된 조선인들의 생일은 음력으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이를 일제 민적으로 그대로 옮겨 적으면서 음력날짜를 양력처럼 취급했다. 그리고 이때 날짜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숱한 오류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198545일자 <경향신문(5)>에 실린 칼럼 <진실을 그르치는 형식>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910년에 한일합방을 강요당한 후 소위 조선총독부란 것이 생기면서 헌병정치를 펴서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일제는 일반 민원사무인 호적에 관한 일도 헌병에게 맡겨 이를 처리하게 하였다. 각 지방에 군청이 있고, 그 산하에 면사무소가 있었지만, 면장은 모두 한국 사람이라 믿지 못해서 그랬는지, 헌병으로 하여금 호적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 우리나라에 종래부터 있었던 호적을 다시 정리한다고 민적(民籍)이란 명칭으로 가족별로 대장을 만들어 각 지방 헌병분견소에 비치하였었다. 헌병분견소에는 소장인 일인 헌병이 한사람씩 밖에 없었고, 일어를 조금 아는 한인 청년을 헌병조원이란 명칭으로 몇 사람씩 두었는데, 그들의 사무능력이 말이 아닌 정도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호적에서 이기(移記)하여 민적대장을 만들 적에 많은 착오가 생기게 되었다. 이름자가 잘못되고 가족관계가 틀리고 본관이나 생년월일이 잘못 기록된 일이 비일비재였다.”

 

<자료8> 국어학자 이희승 칼럼, “진실을 그르치는 형식> (경향신문, 198545, 5)

이렇게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최준현의 조선 호적이 일제 헌병의 관할 아래 일제 민적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9111224일인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호적 번역을 담당한 일제 헌병이나 조선인 헌병조원에 의해 19111124일로 잘못 기록되었던 것이다. 이희승은 같은 칼럼에서 자신의 비슷한 경험도 털어놓았다.

 

대한제국시대의 호적에는 가족의 생년이 개국 몇 년으로 되어 있었는데, 조선개국(朝鮮開國)이란 연호를 피하기 위해 일제는 메이지(明治) 몇 년으로 환산하여 민적에 기입하였었다. 그런데 그 환산이 잘못되어 우리 가족의 생년이 모두 1년씩 늦어지게 되었다. 나 자신 개국505(서기1896)생인데 일본의 메이지29(서기 1897)생으로 잘못 환산하여 형식상으로 한 살이 줄어들게 되었다.

 

또 대한제국 시대에 호적을 작성할 적에는 생년월일에 음력을 사용하여 428일생인데, 오늘날 호적에는 이 생일이 자동적으로 양력으로 둔갑을 하여, 공식상으로는 양력 428일생으로 행세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실제로는 양력 69일이 내 생일이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428일생으로 인정받고 있다.”

 

 

일제가 조선의 호적을 일제식 민적으로 전환할 때 조선인들의 음력생일을 그대로 민적에 옮기면서 양력날짜 취급했을 뿐 아니라, 그나마 조선의 연호(개국)를 일제의 연호(메이지)로 바꾸면서 민적 계원들이 계산상의 혼란을 일으켜 오류가 발생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의 호적기록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막내딸 최승희의 생일기록이 메이지44(=1911) 1124로 기록된 것은 “1224의 잘못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기록계원이 두 이()자를 한 일()자로 잘못 보아 저지른 실수였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