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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2023취재

[도호쿠2023취재] 38. 최승희 탄생일 (3) 호적과 학적부

3. 호적과 학적부

 

정병호가 최승희의 생년과 생월일을 확정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자료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부친 최준현의 호적(1)과 숙명여학교 학적부(2)였다. 이 두 초기 문서에는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11124일로 기록됐다. 필자는 이 두 자료를 가장 먼저 재검토해 보기로 했다.

 

부친 최준현의 호적은 서울시 종로구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종로구청을 방문해 호적열람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개인정보보호법(2010)이 시행되면서 직계 가족이 아닌 제3자가 타인의 호적을 열람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호적열람의 목적이 연구목적임을 밝히고 최준현은 물론 그 직계 가족들이 모두 사망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호적 열람을 거듭 요청했다. 기록관리사는 대안을 제시했다. 열람이 필요한 사항을 서면으로 요청하면 기록관리사가 호적을 대신 열람해서 확인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확인이 필요한 10여 가지를 신청서에 기입해 제출했고, 그 중에는 최승희의 생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록관리사가 확인해 준 최승희의 생일은 19111124일이었다. 호적이 보존상태가 불량한 종이 문서이고 기록이 일본식 한자로 흘려 쓴 것이어서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최승희의 생일은 분명히 그 날짜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연구목적이라 하더라도 호적의 복사본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고 했다. 필자가 호적 기록을 직접 열람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전문 기록관리사가 대신 확인해 준 것은 정보의 확실성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최준현의 호적에 등재된 최승희의 생년월일은 19111124일로 거듭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병호의 호적 열람 절차도 필자와 비슷했을 것이다. 필자와 달리 정병호는 최준현의 호적을 직접 열람할 수 있었지만 그도 호적의 사본을 얻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저술한 평전에 호적 사본의 사진이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필자는 최승희의 숙명여학교 학적부를 조사했다. 당시 필자는 유럽 조사 중이었기 때문에 전직 언론인 출신의 지인이 필자대신 취재를 해 주었다. 그는 숙명여고를 방문해 최승희의 학적부를 열람하고 그 사본을 만들어서 내게 이메일로 전송해 주었다. 거기에도 최승희의 생년월일은 메이지44(=1911) 1124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학적부에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생년월일이 1224일로 기록되었다가 생월인 12월이 11월로 수정되어 있었다. 12월로 먼저 기록했다가 이를 11월로 바로잡은 것이다. 정병호의 평전에 나타난 학적부의 사진에도 생년월일이 수정되어 있었다. 이 평전을 여러 번 읽었던 필자도 그때까지 이 수정사항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더구나 컬러 복사된 학적부의 생년월일 난을 자세히 보면 12월에서 11월로의 수정이 즉석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수정할 때 사용한 잉크 색깔이 원래의 잉크색깔보다 더 진할 뿐 아니라, 한 일()자의 가로획 필체가 원래의 열 십()자나 두 이()자의 가로획 필체와 달랐다. ,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수정되었다는 뜻이다.

 

 

호적상의 생월일이 1124일인데 어째서 학적부에는 1224일로 기록되었을까? 아마도 이 학적부의 인적사항은 최승희 본인이나 부친 최준현이 작성했거나, 혹은 최승희의 구술로 담임선생이 작성했을 것이다. 아마도 후자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승희가 본인의 생일을 잘못 말했다는 것일까? 자기 자신의 생일을 잘못 구술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그리고 이 잘못기입된 생월이 어떤 경로로 다시 1124일로 수정되었던 것일까? 학적부의 생년월일이 한번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확인 되었지만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