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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14학교

[대륙14학교] 37. 배은선 강연-외전 (5) 최승희와 대륙횡단철도

대륙횡단철도라면 우리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떠올린다. 남북철도를 다시 연결하려는 노력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해 물류를 원활하게 하려는 관심 때문인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실제로 남북철도 복원 사업도 진행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손기정 선생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했었기 때문이다.

 

 

193664일의 <경성일보(7)>는 손기정, 남승룡을 포함한 일본육상 대표단 선발대가 63일 오후310분에 경성역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쿄에서 출발한 것은 61일 저녁이었을 것이다. 이는 최승희가 경성공연을 위해 여행했던 경로와 같다.

 

손기정과 남승룡 선생이 경성에 도착했을 때, 조선체육협회의 임원들과 손기정 선생의 모교인 양정고보의 선후배가 경성역에 나와 이들을 맞았다고 한다. 선발대는 서울시내 오오츠카(大冢)여관에 숙소를 마련하고, 가벼운 몸풀기 후에 양정고보가 주최한 환영회에 참석했다.

 

64일 아침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손기정, 남승룡 선생은 아침 운동을 했고, 오후330분에 출발하는 <노조미>에 승차해 다시 원정길에 올랐다. 경성 출발 이후의 여정은 종합잡지 <삼천리> 19375월호에 손기정이 기고한 베를린 원정기라는 글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64일 오후 경성역을 출발한 열차를 타고 북상한 손기정은 그날 밤 열한시 ... 내고향 신의주에 당도했다고 기록했다. “기차관계상 그냥 안동현까지 가서 차에서 내리니 거기서 정거장까지 환송나온 가족과 동무들을 만났다고 했는데, 이는 히카리와 노조미 등의 급행열차가 신의주에는 2분밖에 정차하지 않았던 반면, 안동역에서는 30분간 정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손기정은 이튿날 아침 봉천에 하차하여 시가와 북륙을 구경한 뒤 다시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도중 신경에서 성대한 환영이 있었다고 했고, “하얼빈에서 1박하고, 연습을 조금 하고 난 뒤에 다시 만주리로 향하였는데, “만주리에 도착하기는 69일 아침이었다고 썼다.

 

9일밤 만주리에서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에 들어갔, “이로부터 5일간 시베리아 평원을 횡단하는 단조로운 여행이 계속되었는데, 이때의 감상을 손기정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망막한 평원이 한없이 계속되고 있는 삼림은 오직 놀랄 밖에 도리가 없었다. 처처에 있는 대도시의 외에는 연선에는 그리 많이 민가가 보이지 않으나 풀밭에는 도처에 소, , 양떼들이 있었다. 철도는 조선 것보다 몹시 광궤(廣軌), 규모도 컸으나 시간을 잘 지켜주지 않는 데는 기막혔다. 어떤 데서는 30분도 정차하는 까닭에 플랫홈에 내려 연습할 수 있었다.”

 

옴스크를 지난 지낸 것은 (6)12일 오후 두 시었다. 역시 가도 가도 광막한 평야뿐으로 조선의 경부, 경의선같이 산이라고 보려야 볼 수 없었다. 철도 연선에는 다수한 노동자가 일하는 것이 보였는데 그중에도 부녀자가 철로 레일 수선을 하고 있는 모양에는 오직 놀랐다.”

 

시베리아를 가로지른 후 손기정 일행은 614일 밤에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다음날 일본대사관의 안내로 시내 구경을 했다. 이때 손기정은 모스크바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도이니만치 여러 가지의 근대적 설비가 훌륭히 되어 있었다. 대건축과 도로의 완비에는 더욱 놀라게 하였다. 크레믈린 궁전, 각종의 사원 소문에 듣던 붉은광장 등 모두 장대한 것이었다고 감상을 적었다.

 

 

그러나 공원에 초화(草花)로써 이 나라 정치가의 얼굴을 만들고 있는 것은 더욱 눈에 걸리더라라고 하여 소련의 스탈린 숭배에는 거부감을 느꼈다.

 

615일 밤11시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폴란드로 향했고, 616일 정오에 소련-폴란드 국경을 통과하여 오후8시에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바르샤바에서도 약 2시간 동안 자동차로 시내 구경을 한 후, 10시에 바르샤바를 출발,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617일 아침9시였다고 했다.

 

61일 도쿄를 출발해 617일 베를린에 도착했으니 1617일의 여행이었고, 이때의 철도여행의 거리는 거의 15Km에 달했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김구나 김일성, 이승만 같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몰랐지만, 손기정과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문과 잡지, 라디오 등의 미디어가 광범위하게 보도했던 까닭도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한민족의 자긍심을 유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일감정 때문이었다. 일제에 강점된 식민지 백성으로서 조선인들은 정치, 군사적으로 언제 어떻게 일제를 타개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일본에 지지 않는 것만이 민족자긍심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극일의 자긍심은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것은 조선의 최고, 즉 조선일(朝鮮一)이나 일본의 최고(日本一) 정도로는 충족되지 않는 자긍심이었다. 오직 세계 최고(世界一)가 되어야 이견의 여지없이 극일이 달성된 것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세계일이 되어서 한민족의 민족적 자긍심을 세워준 것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세계최고 무용가 반열에 오른 최승희였다. 이들은 달리고 춤추는 것으로 일본인들이 이견을 제기할 수 없는 세계일의 업적을 달성한 조선인들이었다. 비록 그런 업적을 일본 국적으로 달성했더라도 조선인들도 개의치 않았다. 일장기 말살사건은 그래서 발생했다.

 

손기정과 최승희는 원래 공통점이 많았다. 두 사람은 각각 숙명여학교와 양정고보를 졸업했는데, 이는 진명여학교와 함께 대한제국 황실이 설립한 학교였다. 이 세 학교의 졸업생들은 연합동창회를 구성하고 있었고, 최승희와 손기정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직후 도쿄의 라디오 방송국은 최승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때 최승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이 우승해서 기쁘다. 그런데 조선인이 우승해 주어서 더욱 기쁘다.”

 

손기정과 최승희는 1930년대에 대륙횡단철도를 이용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진다. 손기정은 19366월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도쿄-베를린의 15천킬로미터를 철도로 여행했고, 최승희는 19382월과 19402월과 4월에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로 여행했다.

 

최승희는 1938112일 미주순회공연의 첫 목적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SFLA에서 공연했으나, 예정보다 일찍 뉴욕으로 가야했다. 캘리포니아의 반일운동이 예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는 2월 중순 LA를 출발해 SF와 시카고를 경유하는 대륙횡단 철도로 뉴욕에 도착했다. 이것이 최승희의 첫 번째 미대륙 횡단철도여행이었다.

 

 

그의 두 번째 미주대륙 횡단은 19402월이었다. 217일 뉴욕 콜롬비아 대학교가 주최하는 <댄스시리즈>에 출연한 최승희는 222일 시카고 시빅극장에서 공연을 가진 후, 315일 시애틀 공연을 갖기 위해 샌프란시스코까지 대륙횡단철도를 이용했다.

 

최승희는 시애틀(19403/10)과 포틀랜드(3/10), LA(3/30)와 샌프란시스코(4/7) 공연을 마친 후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중남미 순회공연이 제안되었고, 그 첫 공연으로 푸에르토리코 공연(4/22)의 일정이 잡혔다. 이에 최승희는 다시 한 번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미국횡단 철도에 올라탔다.

 

 

뉴욕-샌프란시스코 사이의 철도는 대략 4,500Km이므로, 그가 기차로 미대륙을 횡단한 거리는 대략 14500Km이 넘는다. 손기정이 도쿄-베를린 철도여행으로 단번에 주파한 15Km의 거리를 최승희는 세 번의 미국대륙 횡단철도 여행으로 근접하게 달성했던 것이다.

 

손기정이 베를린에서 도쿄로 돌아올 때에는 선편을 이용했으므로 철도여행 기록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반면 최승희는 세계순회공연 동안 태평양과 대서양을 왕복하는 선편 여행에다가 뉴욕-리오데자네이로 선편여행도 추가했고, 남미대륙에서도 수천Km의 기차여행을 해야 했다.

 

 

요컨대 조선일과 일본일을 넘어 세계일을 달성하는 데에는 타고난 재능과 함께 부단한 노력으로 숱한 역경을 이겨내야 했지만, 그와 함께 엄청난 세계 여행을 해야 했다. 손기정과 최승희는 대륙횡단철도여행의 면에서도 여느 조선인이나 일본인들이 넘볼 수 없었던 세계일의 철도여행을 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jc, 2023/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