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을 화두로 삼은 정지아 선생의 강연은, 평등한 사회와 관용의 개인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역설했습니다. 그와 함께 사회의 불공정과 개인의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강조해 주셨지요.
<빨치산의 딸>은 한국 사회의 불공정과 개인들의 편견이 부과한 박해의 최대치였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구조적으로 조직화된 불공정과 편견 속에서도 보편적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는 개인들의 노력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빨치산 부부와 그 동지들, 그리고 그들의 딸과 아들들이 견지했던 가치가 어떻게 전승되고 궁극적으로 꽃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향후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몸담은 <무용신>에게도 그런 노력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가 중요한 숙제지요.
<무용신>은 처음부터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차별과 일부 극우단체들의 편견에 주목했었습니다. 이같은 차별과 편견, 그리고 그로부터 배태된 폭력 때문에 재일조선학교의 여학생들은 한복 교복을 양식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일부 학교에서는 등하교할 때는 양식, 학교 생활을 할 때는 한식 교복으로 갈아입는 번거로움을 선택하기도 했을 정도였지요.
조선학교 무용부는 거의 프로페셔널에 가까운 공연력과 예술성을 갖추고도 일본 사회에서 거의 발표되지 않습니다. 일본 사회가 조선무용을 민족예술의 한 분과로조차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세상에나, 차별과 불공정이 이 정도에 이르면 거의 폭력인 것이지요.
제가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가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조사연구였습니다만, 이번 정지아 선생의 강연을 들으면서, 최승희 선생도 자신을 문화적 빨치산으로 자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들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예술무용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던 시절에 무용을 시작했고, 일본의 무용가들은 가부키와 노 등의 일본 전통무용이거나 서구식 현대무용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민족무용을 만들어 다른 무용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지요.
게다가 최승희-안막 부부는 그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조선과 만주, 일본과 세계를 주유하면서 순회공연을 다닐 때에도, 유명 관광지를 구경하거나 명사들과의 사교모임에 참석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조선무용의 창작과 공연에만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최승희 선생은 불후의 무용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일본인 예술평론가들조차 1977년의 한 잡지에서 “일본 무용가 중에서 최승희 정도의 대스타 반열에 오른 사람은, 최승희 이전에도 없었고, 최승희 이후에도 없다”고 평가할 정도입니다.
오늘날 재일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은 1933년에 조선무용을 시작하신 최승희 선생의 후예들입니다. 시간이 90년이나 흘렀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더군요. 기회의 불평등과 체계적인 편견이 더욱 구조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승희 선생이 조선무용 창작과 공연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2천만 조선동포의 염원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승희 선생은 작품과 공연으로 그 염원에 화답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하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동포가 과거의 최승희 선생을 후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의 재일조선인과 한국인들이 자신의 수명과 소명을 다하고 사라지더라도 ‘조선무용’은 남아서 미래의 새로운 한국인들에게 전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용부 학생들에게 일 년에 무용신 한두 켤레 전달하는 것이 고작인 <무용신> 활동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빨치산 정신이 아닐까요?
근본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면, 최승희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재일조선학교 무용부와 <무용신>도 문화적 빨치산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jc, 202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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