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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자서전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2) 몰락

2. 경제적 몰락의 이유

 

모든 평전과 연구서들은 최승희가 여학교 1학년 시절에 아버지 최준현이 경제적으로 몰락했다고 서술했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그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면 이러한 서술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시기의 문제이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에 시작되어 1918년에 끝났다. 최승희 집안이 여학교 1학년 때 몰락했다면 그것은 19224월부터 19233월 사이의 일이다. , 토지조사사업 자체가 최승희 집안의 경제적 몰락의 직접 원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특히 최승희가 태어난 경성부 서부 지역의 토지조사사업은 1913년에 끝났고, 부친 최준현의 토지가 있던 강원도 홍천지역의 토지조사사업은 1916년에 끝났다. 최준현 일가는 토지조사사업이 끝나고도 짧게는 6, 길게는 9년 동안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다는 뜻이다.

 

 

둘째, 토지조사사업의 효과 문제가 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의 지주들은 토지에 대한 완벽한 소유권을 갖게 되었다. 손해를 본 것은 소작인들이었다. 관행으로 유지하던 소작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최준현은 지주, 그것도 대규모의 지주였다. 총독부가 정한 절차에 따라 자신의 토지를 등록했다면 그가 자신의 부동산을 빼앗겼을 리 없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작성된 토지조사대장에는 130건 이상의 가옥과 전답과 임야가 최준현의 이름 아래 등록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자기 명의의 부동산을 제대로 등록했다는 말이다. 그의 몰락이 토지조사사업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그렇다면 최준현은 왜 그 많은 전답과 임야와 주택을 잃어버린 것일까?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대답이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에 나타나 있다.

 

 

도련님으로 자라셨고 사람만 좋으셨던 아버지는 남의 모략에 걸려 빚 보증인이 되시거나 토지 매매에서 계략에 말려 실패하시는 바람에,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신 것입니다.

 

최준현 일가가 몰락한 것은 빚보증과 토지사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최준현이 어떤 정황에서 빚보증을 배상하고 어떻게 토지사기를 당했는지에 대한 서술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최승희가 아버지를 사람만 좋으셨다고 여러 번 반복 서술한 것으로 보아, 친척이나 친구들의 빚보증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토지사기에 대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130건에 달하는 최준현의 토지는 장손에서 장손으로 전해지는 문중 재산이었을 것이다. 이는 최준현의 동생 최문현의 이름으로 등록된 부동산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아마도 이 문중 재산이 배분되는 과정에서 최준현이 친족의 토지사기나 빚보증을 통해 재산을 잃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추론은 최승희가 지적한 경제적 몰락에 대한 또 다른 서술과도 부합된다.

 

 

안이 파멸의 쓰라림을 겪게 된 것이 아버지가 지나친 호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겠지만, 그렇게만 단정할 수 없는 당시의 사회 정세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경제 구조가 세워지면서 낡은 유한, 유산계급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족도 이 계급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같은 시대적 쓰나미에 휩쓸린 것입니다.

 

최승희가 말한 새로운 경제 구조당시의 사회 정세란 회사령(1910)의 폐지(19204)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회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자 조선인들은 회사 설립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곤 했는데, 경영에 미숙한 조선인들의 회사가 도산하면서 담보 잡혔던 부동산들이 은행이나 개인 채권자에게 넘어가곤 했다.

 

최준현도 자신이 회사 설립을 시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친척이나 친구들의 회사 설립에 보증을 섰다가 자신의 부동산을 빼앗겼던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나의 자서전>에 따르면, 최승희 집안의 몰락은 토지조사사업 때문이 아니라, 회사령 폐지로 시작된 조선 사회의 산업화 초기에 만연했던 빚보증과 토지사기의 결과였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