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22. 봉산탈

<가면춤(假面, 1935)>은 최승희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상연한 첫 무용 작품이다. 19351022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제2회 도쿄공연에서 최승희의 독무로 초연되었고, 이후, 교토(118), 다카라즈카(119), 카나자와(1936127), 그리고 73일부터 시작된 타이완 순회공연에서도 상연되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郞)는 평전 <최승희(1959, 57)>에서 <가면춤>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조선의 가면무용으로는 처용무, 산대극의 극중 무용 등이 대표적인 예이지만, 현재는 민간에 퍼진 것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을 기반으로 창작한 춤. 신나는 활발함과 소박한 유머, 그리고 약간의 저속함이 어우러져 있다.”

 

 

일본의 사진잡지 <아사히카메라(アサヒカメラ)> 19361월호에는 최승희가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린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은 19361월호 잡지에 실렸으므로 1935년 말에 촬영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사진은 19351022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제2회 도쿄공연에서 상영된 <가면춤>을 촬영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 가면의 머리 꼭대기에 상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처용무에 사용된 것은 아니다. 처용의 가면에는 복숭아로 장식된 검은 사모가 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봉산탈춤의 양반 가면도 아니다. 양반은 정자관(샌님)이나 갓(서방님)을 쓰거나 상투를 틀기 전의 땋은 머리(도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면은 조선시대 상민의 모습인데, 봉산탈춤의 상민이라면 양반과 승려를 놀리는 취발이와 말뚝이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만으로는 이 가면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을 가리키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한편, 1936922일의 제3회 도쿄공연에서는 <가면에 의한 트리오(假面によるトリオ, 1936)>가 초연됐고, 이 작품은 아사히카와(1113), 오타루(1117), 삿포로(1118) 등지의 홋카이도 순회공연과, 나고야(1937120), 교토(127) 등의 간사이 순회공연, 그리고 다롄(313)을 비롯한 만주 순회공연에서도 상연됐다.

 

 

<가면에 의한 트리오>3인무였다. 도쿄 제3회 공연과 홋카이도 순회공연에서는 최승희와 김민자와 토키와 이츠시(常磐一志)가 공연했고, 간사이 순회공연에서는 김민자와 미도리카와 히사코(綠川壽子), 히라사와 키요코(平澤喜代子)가 상연했다. 처음에는 최승희도 이 3인무에 참여했으나, 시간이 가면서 제자들에게 넘겨주었다.

 

19361118-19일 홋카이도 삿포로의 호에이자(寶瑩座)에서 열렸던 최승희의 신작무용 발표회에서도 <가면에 의한 트리오>가 상연되었는데, 공연 프로그램에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가면극 중 하나이다. ‘산대도감극안의 극중 무용을 기반으로 새롭게 창작한 작품. 젊은 여성을 가운데에 두고 파계승과 도락옹(道樂爺) 사이에 형성되는 천박한 분위기를, 뛰어난 풍자로 그려낸 유머러스한 사랑의 춤.

 

 

황해도의 봉산탈춤은 경기도의 양주별산대와 송파별산대와 함께 대표적인 산대도감극이다. 이는 영남의 오광대, 함경도의 사자놀음 등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탈춤이다. 따라서 <가면에 의한 트리오>의 해설에 나오는 산대도감극 안의 극중 무용을 봉산탈춤의 한 부분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특히 젊은 여성을 가운데 두고 파계승과 도락옹 사이에 형성되는 천박한 분위기라는 서술로 미루어 이는 봉산탈춤의 제4과장(科場, 연극의 막()에 해당하는 탈춤의 진행 단위)의 노장춤을 가리킨다. 노장춤은 3(, 연극의 장()에 해당하는 탈춤의 구분 단위)으로 구성되는데, 1경은 늙은 중인 노장(老丈)이 젊은 여성 소무(小巫)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파계하는 장면이고, 3경에서는 평민인 취발(醉發)이가 등장하여 파계한 노장을 쫓아내고 소무를 차지한다. 따라서 <가면에 의한 트리오>는 봉산탈춤의 제4과장 3경을 현대화한 조선무용 작품임에 틀림없다.

 

 

다른 한편, 최승희는 1937927일 도쿄극장에서 열린 도구(渡歐)고별공연에서 <봉산탈에서(鳳山タールより)>를 발표했다. 제목으로 미루어 이 작품이 봉산탈춤의 일부임을 알 수 있더라도 7개 과장 중에서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지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사진작가 후쿠다 카츠지(福田勝治, 1899-1991)19383월에 출판한 사진집 <봄의 사진술(写真術)>에 최승희의 <봉산탈> 사진이 실렸다. 저자는 이 사진이 최승희 주연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가 촬영되는 동안 니카츠 영화사의 세트장에서 동시에 촬영된 것이라고 서술했다. <대금강산보>에는 8개의 조선무용 작품이 삽입되었는데, 얼굴에 탈을 쓰고 활발한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이 사진은 <봉산탈>임에 틀림없다.

 

<봉산탈> 사진을 찍을 때 후쿠다 카츠지는 최승희가 바닥에 누워 춤추는 것세트 천장의 막대기 한 개를 건너가서 판자 위에 서서 반사경을 들여다보면서 촬영하느라고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현장감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공들여 찍었다는 뜻이다. 최승희가 바닥에 누워 추는 춤이라는 서술에서 이 장면이 봉산탈춤의 팔목중춤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봉산탈춤 제2과장의 팔목중춤의 첫 장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먹중’, 혹은 묵중이라고도 불렸던 목중은 파계한 승려이다. 봉산탈춤의 제2과장에서는 8명의 목중이 독무와 중무, 군무를 이어간다. 그중 첫째로 등장하는 목중은 소매 끝에 기다란 한삼이 달린 붉은 원동에 더거리를 입고, 큰 방울을 무릎에 달고, 버드나무 생가지를 허리 뒤쪽에 꽂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무대로 달려나오자마자 무대의 중앙에 쓰러진다.

 

쓰러진 목중은 누운 채로 타령 반주에 맞추어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발끝과 손끝, 다리와 팔, 허리와 몸통으로 동작이 점점 커지면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일어나다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마침내 두 발로 일어서면 반주 속도가 빨라지고 목중은 팔을 휘젓고, 다리를 쳐들고, 소매를 휘저으면서 쾌활하게 춤을 추다가 춤판을 휘돌아 달린 후에 퇴장한다.

 

최승희는 1935년부터 봉산탈춤을 소재로 한 조선무용 작품을 매년 1개씩 안무한 셈이다.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는 사진들로 미루어 최승희의 <가면무><봉산탈>은 독무이지만 서로 다른 작품이다. 봉산탈춤에서 소재를 얻은 이 작품들은 모두 피지배 계층인 상민과 천민이 지배 계층인 승려와 양반의 타락과 무능함을 비판하고 희화화하는 내용이다.

 

 

<봉산탈>은 세계 순회공연에서도 자주 상연됐다. 1938122일의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는 <봉산탈(Mask of Hosan)>이나 <봉산곡(鳳山)>, 22일의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는 <조선의 유랑인(Korean Vagabond)>, 220일과 116일의 뉴욕 공연에서는 <반도의 방랑자(半島放浪者)>이나 <조선의 유랑인(Korean Vagabond)>이라는 제목으로 상연된 작품이 모두 <봉산탈>이었다.

 

 

최승희가 무용 작품에 탈을 사용한 것은 그녀만의 독자적인 시도는 아니었다. 1925118일자의 <동아일보>에 심훈(沈熏, 1901-1936)의 영화소설 <탈춤>이 연재되기 시작했고, 1928423일자의 <중외일보(3)>는 영화감독 이경손(李慶孫, 1905-1977)이 탈을 이용한 영화를 제작 중이며, 이를 위해 강원도를 방문해 각종 탈을 수집해서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당시에 조선의 예술인들이 탈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탈은 18세기의 과학문명이 발달되기 전까지 성행하여 옛날의 극의 중요한 요소였으므로 문학사(文學史)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인데, 최근 다시 러시아의 그레그의 신극운동에 탈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탈을 이용한 연극이 부활하고 있다. 조선에도 탈이 풍부하여 이경손씨가 탈을 이용한 영화를 제작하는 새로운 시험을 하고 있어서 많은 흥미를 끄는 바이다.”

 

192895일자 <동아일보(3)>는 인사동에 조선인이 개점한 최초의 커피 전문점 <카카듀>가 문을 열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세대>19644월호에 실린 이봉구(李鳳九)의 회상에 따르면, <카카듀>는 영화감독 이경손이 하와이 출신의 미스 현과 공동 경영한 카페로, 그 내부 실내장식에 봉산탈춤의 가면을 걸어놓았다고 서술했는데, 이 가면들은 이경손 감독이 영화제작을 위해 강원도에서 수집해 왔던 것들로 추정된다.

 

 

, 최승희가 봉산탈춤을 소재로 가면을 사용한 무용작품을 창작한 것은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봉산탈 붐에 편승한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선구자인 심훈과 이경손이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의 친구들이었음을 고려하면, 최승희가 봉산탈을 작품화한 데에는 이같은 인맥을 통한 영향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jc, 2026/5/15)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