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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20. 보살춤

<보살춤(1937)>은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종교적이면서도 선정적인 의상, 그리고 최소한의 몸동작에 수반된 느리지만 화려한 손동작 때문이었다. 무대 중앙에 집중된 조명 속에서 신비로움에 취한 최승희의 표정도 탁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보살춤>19374월초 이왕직 본청 주최의 순정효황후 윤씨 위로 공연에서 <보현보살(普賢菩薩)>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다. 보현보살은 행원(行願), 즉 실천의 덕을 상징하는데, 지혜(知慧)의 덕을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함께 석가모니를 모시는 협시 보살이다.

 

이 작품은 1937927일 도쿄극장에서 열린 도구(渡歐)고별공연에서도 상연되었는데, 공연 프로그램에 나타난 제목은 <금강산 쌍곡: A. 보살도>였다. “금강산 쌍곡(金剛山雙曲)”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의 삽입곡이었고, <보살도(菩薩)>라는 제목에 나타나듯이 보현보살의 모습을 그린 불화에서 소재를 얻은 작품이다.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郞)의 평전 <최승희(1959)>에는 <보살춤>의 사진이 2장 실렸는데, 그 사진설명(135, 145)에는 이 보살이 <살타보살(薩埵菩薩)>이라고 서술되었다. <보현보살><보살도>, 그리고 <살타보살>이 서로 다른 작품인지, 혹은 같은 작품의 개작이거나 개명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 작품들에 대한 문헌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타보살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다. 관음보살이나 지장보살,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처럼 이미 불가와 민가에 널리 알려진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살(菩薩)은 한자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이며, 산스크리트어 보디삿타(बोधिसत्त्व, Bodhisattva)의 번역어이다. 보리(Bodhi)깨달음,’ 살타(Sattva)존재라는 뜻이므로, 보살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깨달음에의 의지를 가진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자비와 선행을 실천하고 열반에 이르기를 서원한 사람을 가리킨다. 현대에는 그 뜻이 느슨해져서 불교도를 일상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살타보살이란 살타보리살타이라는 말이어서 살타가 중복된 이름이므로, 결국 살타보살보살은 같은 말이다. 그래서 최승희의 <살타보살>이 미국과 유럽에서 상연될 때에는 <보디삿타(Bodhisattva)>, <보살>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곤 했다.

<보살춤>1937927일의 도구(渡歐)고별공연에서 <금강산쌍곡 A. 보살도>라는 제목으로 상연되었지만, 125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도미(渡米)고별공연에서는 재연되지 않았다. 공연 이름이 도구고별공연에서 도미고별공연으로 바뀐 것은 이 사이에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변경되었음을 말해 준다.

 

19371211일의 <니치베이(日米)신문> 영어판(4)193819일자 <오클랜드 트리뷴(Oakland Tribune, 43)>에 따르면 <보살춤>1938122일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상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22일자 <니치베이신문>의 영어판(2)과 일본어판(3)에 보도된 프로그램에는 <보살춤>이 나타나지 않아, 실제 공연에서는 상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보살춤>193822일의 로스앤젤레스 공연과 220일의 뉴욕 공연에서도 상연되지 않았고, 그해 116일의 뉴욕 2차 공연에서 비로소 상연됐다. 114일자 <신세카이아사히(新世界朝日)신문> 일어판(3)은 이 작품을 <菩薩>로 소개했고, 117일자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The Brooklyn Daily Eagle, 12)><Bodhisattva>라고 보도했다.

 

즉 세계 순회공연에서는 <보살춤>1938116일의 제2차 뉴욕 공연에서 초연되었던 것인데, 이는 <보살춤>이 상연하기에 부족함이 있다고 판단한 최승희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에도 개작과 연습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뉴욕 제2차 공연에서 발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보살춤>1939131일의 파리공연에서도 상연됐는데, 이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불교 분위기에 푹 잠긴 최승희는 차분하고도 우아한 불교 예술의 아름다움, 즉 순수하고 고요한 부처의 청정심, 곧 열반의 심상을 표현하려고 한다고 해설되었다. (jc, 2026/5/10)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