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순회공연을 떠나면서 최승희는 22개의 짐 가방을 챙겼다. 당시의 여행용 가방은 사람이 걸터앉을 수 있을 만큼 크고 튼튼한 궤짝 형태였는데, 거기에 담긴 짐의 대부분은 무대 의상과 소품, 악기와 축음기와 반주음악 레코드 등의 공연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이에 더해 안막과 최승희는 의복과 개인용품 뿐 아니라 조선의 문방구와 장신구 등도 준비했는데, 방문하는 곳마다 전시회를 열어 조선의 문물을 소개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22개의 짐 가방 중의 하나에는 영화 필름이 들어 있었다. 최승희 주연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大金剛山の譜)>였다. 니카츠(日活) 영화사 제작, 다마카와 에이지(玉川映二, 1903-1973) 원작, 홍난파(1898-1941)와 이종태(1904-1966) 음악, 야마다 코사쿠(山田耕作, 1886-1965) 편곡, 미즈가에 류이치(水ヶ江龍一) 감독, 최승희와 카사하라 츠네히코(笠原恒彦, 1911-1989) 주연의 이 흑백 발성 영화는 러닝타임이 63분이었다. 당시의 필름 한 롤은 대략 10분 상영 분이었으므로, 최승희는 7개의 필름 롤을 가지고 세계 순회공연 길에 올랐다.
1937년 2월18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대금강산보>의 제작을 제안한 것은 경성관광협회 소속의 기업인들이었고 조선총독부 외사과가 동조했다. 194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을 방문하는 올림픽 방문객을 조선으로 유입하려는 계획이었다. 상시적인 재정난을 겪고 있었던 조선총독부도 국제관광객 유치가 적은 투자로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점에 착안, 조선 제일의 명승지 금강산을 주제로 한 홍보 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다. 영화의 주연으로는 이미 일본과 조선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최승희를 초빙하기로 했다.

5월말에 영화음악과 편곡이 완성됐고, 6월말에는 영화에 삽입될 8개 무용작품의 창작도 마무리되었다. 8개 작품의 안무가 불과 한 달 남짓의 기간에 완성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7월1일 조선총독부는 니카츠(日活)를 제작사로 지정했고, 니카츠 영화사는 제작을 타마카와(多摩川) 촬영소에 배당했다. 타마카와 촬영소는 즉시 원작와 각색, 감독과 촬영 등의 담당자들을 지정했다. 제작 예산은 10만원이었는데 외사과와 철도국이 지원을 약속했다.
2월15일경 시작된 <대금강산보>의 제작이 넉 달 반 만에 촬영에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은 권력기관(총독부 외사과와 철도국)와 대기업(경성관광협회와 니카츠)이 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적은 올림픽 특수를 겨냥한 관광수입이었다.

최승희가 <대금강산보> 제작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총독부와 재계의 제안을 거부하기도 어려웠고, 둘째는 최승희 자신이 기획하고 있던 세계 순회공연에 이 영화가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대금강산보>가 세계 각국에서 열릴 조선무용 공연을 위한 사전 홍보매체가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37년 7월7일 발발한 노구교사건을 이내 중일 전쟁으로 번졌고, 총독부 외사과와 철도국은 전쟁 수행에 집중하느라 <대금강산보>의 제작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외사과와 철도국의 지원이 소홀해지자 <니카츠>도 열의를 잃었다. 더구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올림픽 개최권을 박탈당하고 개최지가 헬싱키로 옮겨지자, 조선총독부와 경성관광협회, 그리고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제작 동기를 상실했고 영화제작은 지연되었다.

<니카츠>는 해외 상영을 포기하고 목표를 국내 상영으로 변경했다. 해외 상영이 필요한 측은 최승희뿐이었고, 그녀는 영화 제작을 위해 참고 기다리며 고군분투했다. 약 4달의 지연 끝에 1937년 10월25일 <대금강산보>의 촬영이 시작됐고 11월말에 촬영이 끝났다. 이후 약 한달 남짓의 편집 기간을 거쳐 12월21일에 시사회를 가졌고, 완성된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3벌이 마련됐다. 일본 상영용, 조선 상영용, 그리고 해외 상영용이었다. 최승희는 해외 상영용 필름 1벌을 가지고 12월29일 요코하마를 출발, 세계 순회공연 길에 올랐다.
1938년 1월21일, <대금강산보>는 도쿄 아사쿠사의 <후지관(富士館)>에서 개봉되었고, 조선에서는 1월29일 경성의 <황금좌>에서 개봉됐다. 최승희의 첫 무용영화 <반도의 무희(半島の舞姬, 1936)> 만큼은 아니었지만, <대금강산보>도 장기 상영되었다. 1939년 3월 도쿄의 <화요극장(火曜劇場)>에서 <대금강산보>가 상연중인 사진이 발굴된 것을 보면 적어도 1년 이상 상영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금강산보>를 조선무용 공연의 선발대로 삼으려던 최승희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당시 선진 기술이었던 발성영화로 촬영된 것은 좋았지만, 외국어 더빙이나 자막을 만들어 넣지 못했고, 또 해당국의 검열 절차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대금강산보>가 전혀 상영되지 못했다. 검열과 일화배척 때문이었다. 1934년 이래 미국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정부 검열과 영화사 자체검열을 통과한 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대금강산보>의 내용 중에 검열에 저촉될 내용은 없었지만, 검열 절차를 진행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검열 절차를 위한 시간이 있었더라도, 당시 미국 시민들의 격렬한 일제불매운동 때문에 ‘일본영화’인 <대금강산보>가 미국에서 상영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금강산보>가 해외에서 상영된 기록은 유럽에서 한 번, 남미에서 한 번이 전부였다. 프랑스에서는 1939년 2월17일 파리의 살 드예나(Salle D'Iena) 극장에서 <대금강산보>가 처음 상영되었고, 남미에서는 1941년 3월20일 페루 리마의 올림포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

파리 상영에는 검열의 문제는 없었지만 통역의 문제가 발생했다. <대금강산보>는 발성영화이었으므로 일본어로 촬영되고 녹음되었다. 따라서 이를 파리에서 상영하려면 프랑스어로 번역해 더빙을 하거나 적어도 자막을 붙였어야 했다. <대금강산보>는 더빙도 자막도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리 상영에서는 변사 방식의 통역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대금강산보>의 일반 상영이 어렵다는 점은 자명했다.

리마 상영 때에는 검열이나 번역의 문제가 없었다. 영화 상영은 페루의 일본인 교포를 대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마에서 상영된 <대금강산보>도 최승희의 조선무용 공연의 홍보물로 활용되지는 못했다. 상영 일시가 1941년 3월20일로, 이때는 최승희가 세계순회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 상영된 필름이 최승희가 소장하고 있던 해외상영용이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대금강산보>는 3벌의 필름이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내용조차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다만 여기저기 흩어진 단편적인 기록을 참고하여 내용을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1938년 2월3일자 <경성일보>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비평문이 게재되었는데, 여기에 줄거리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정략결혼을 피하여 조선으로 도망간 작곡가 지망의 일본인 대학생 토모다(=가사하라 츠네히코)는 부관 연락선에서 무희 이승희(=최승희)를 만난다. 금강산 속에 자리 잡은 그녀의 생가를 방문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약속한 뒤, 토모다는 부모의 승낙을 얻기 위해 도쿄로 돌아간다. 하지만 토모다의 부모가 승희와의 결혼을 허락할 리 없다, 그는 사랑에 몸부림치며 부모님의 집을 떠나 학업을 포기하고 <대금강산보> 작곡에 몰두한다.
“한편, 무희가 되려는 승희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도쿄로) 무단 상경, 향토무용을 기초로 새로운 무용공부에 전념한다. 이윽고 승희의 힘겨운 정진은 결실을 맺어 ‘반도의 무희’로 화려한 데뷔의 날이 왔다. 그러나 바로 그날 병상에 누운 토모다는 완성된 <대금강산보>를 승희에게 바치면서 죽어간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최승희는 경성과 도쿄와 금강산을 배경으로 8편의 조선무용을 상연한다. <무당춤(1935)>과 <아리랑(=민요조, 1934)>, <보살춤(1937)>과 <검무(1934)>, <봉산탈(=가면무, 1934)>과 <무녀춤(=기생무, 1937)>, <승무(1934)>와 <금강산보(1937)>가 그것이다.

<대금강산보>의 작품은 모두 조선무용이었고, 각 작품의 초연 시기를 보면 새로 안무된 작품은 <보살춤>과 <기생무>와 <금강산보>의 3개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작품 안무가 한 달 만에 완성된 것은 3개 작품만 더 창작하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jc, 2026/5/9)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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