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조선무용 사진 중에서 작품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1937년 12월 13일의 재미 일본인 신문 <신세카이 아사히(新世界朝日)신문> 일본어판(3면)의 사진이 그런 예이다.
이 기사의 사진 설명은 “곧 샌프란시스코(SF)에 오는 무용가 최승희 씨”라고만 되어 있어, 작품의 제목이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사진은 같은 신문 12월 15일 자 영어판(7면)에도 실렸는데, 이 기사의 사진 설명도 “최승희(SAI SHOKI)”라고면 밝혔을 뿐이다.

최승희의 작품 사진을 조사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될 수 있다. (1) 사진을 자세히 관찰하여 작품의 내용이나 제목을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 (2) 그 사진이 발표된 시기의 전후에 이루어진 공연의 레퍼토리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 사진은 세밀하게 살펴도 단서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선 의상이 생소하다. 춤추기 어려울 만큼 긴 치마를 입었고, 가슴과 허리에 넓은 띠를 둘렀고, 양손에는 수건 같은 것을 들었다.
이 의상은 보통의 여성 한복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본식 기모노라고 보기도 어렵다. 가슴과 배의 굵은 띠는 여성용 기모노와 비슷하지만, 치마폭이 넓다. 그리고 목 아래의 옷깃은 일본식이 아니라 한복의 동정처럼 보인다.
모자도 생소하다. 챙이 넓고 높이가 낮은 이 모자는 중국식 모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자 끈이 턱에 매어져 있어 공연 중에 벗겨지지 않게 한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모자 끈과는 별도로 바닥에 끌릴 만큼 길게 늘어진 끈 장식은 한국식은 물론 일본식도 중국식도 아니다.

다만 두 가지 단서는 주목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옷감과 옷의 스타일이 고급스러워 보인다. 상류층의 의상이거나 특별한 행사를 위한 예복처럼 보인다. 둘째, 모자 뒤편에 늘어뜨린 베일이다. 사진에는 흐릿하지만, 이 베일도 역시 무릎께를 지나 거의 바닥까지 늘어져 있다. 머리 뒤편으로 길게 내려진 베일은 서양식 웨딩드레스에서 볼 수 있는 장식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이 기사가 보도된 직전과 직후에 열렸던 최승희의 공연을 찾아보았다. 각 공연에서 상연된 연목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최승희는 석 달 전인 9월 27-29일 도쿄극장에서 가졌던 “도구 고별 공연”에서는 3일 동안 23작품을 발표됐다. 공연 제목에 ‘도구(渡歐)’라는 말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때만 해도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는 미국이 아니라 유럽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공연의 23개 연목 중에서 여성 독무로서 이 사진 속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는 작품은 <무녀(舞女)>와 <염양춘(艶陽春)>이다. 다른 작품들은 주인공이 남성이거나, 주인공이 여성이더라도 다른 사진을 통해 이미 제목이 알려진 작품들이다.
한편, 1938년 1월 22일의 <니치베이(日米)신문> 일본어판(3면)은 최승희가 샌프란시스코 커랜(Curran) 극장에서 <조선의 신부(朝鮮の花嫁)>라는 작품을 상연한다고 보도했고, 1938년 2월 2일의 <카슈 마이니치(加州每日)신문> 영어판(5면)은 최승희가 로스앤젤레스 이벨(Ebell) 극장에서 <신혼의 춤(Honeymoon Dance)>을 발표한다고 전했다.

<조선의 신부>와 <신혼의 춤>은 같은 작품을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한 제목일 것이다. 둘 다 젊은 여성의 결혼과 관련된 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관성을 확인해 주는 공연 감상문이 LA에서 발행되던 재일조선인 신문인 <신한민보>에 실렸다. 1938년 2월 10일 자 <신한민보(2면)>에 게재된 “일기자”의 “최승희 무용을 보고”라는 제목의 기사는, <염양춘>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제1막, 1. 염양춤(Ancient Honeymoon Dance). 머리에 보살관을 쓰고 길고 긴 옷으로 발끝까지 나리우고 긴 소매 속에 팔짱을 지르고 섰는 그 모양만으로도 말로만 듣고 소설에서 보던 천상선녀이었다. 팔을 활짝 벌리고 발을 슬쩍 높이 들어 옮기며 도는 것이 조선 고대의 염양춤이라 한다. 그 천천하고도 서정적인 춤은 실로 조선의 옛날 문화를 넉넉히 표현시킨다고 보았다.”
머리에 쓴 것이 ‘보살관’이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긴 소매’라든지 ‘발끝까지 나리우는 긴 옷’은 사진 속 여성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더구나 이 해설은 <염양춘>의 영어 제목을 “고대 신혼의 춤(Ancient Honeymoon Dance)”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 작품 사진은 한 달 전에 도쿄극장 공연에서 상연된 작품 중에서 <무녀(舞女)>가 아니라 <염양춘(艶陽春)>이었음에 틀림없다. ‘염양춘’은 “아름답고(艶) 밝은(陽) 봄(春)”이라는 뜻이다. 인생의 봄을 맞은 젊은이의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

서양에서 신혼기를 가리키는 밀월(蜜月, honeymoon)이라는 말도 그 어원이 ‘꿀(honey) 같은 한 달(month)’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염양춘’은 서양의 ‘밀월’과 같은 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염양춘>이 기악곡 제목이기도 했다. 피리 독주곡으로 궁중에서 연회 때에 주로 연주되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거상악(擧床樂)>, 즉 “상을 받드는 음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세피리나 향피리로 연주되곤 했던 <염양춘>은 가락과 리듬이 느리지만 자유로운 편이어서 여유와 기품 있는 느낌을 준다.
최승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상연한 <조선의 신부(朝鮮の花嫁)>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상연한 <신혼의 춤(Honeymoon Dance)>은 조선어 제목 <염양춘(艶陽春)>을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한 제목이었다.
그리고 최승희가 자신의 <염양춘>을 상연했을 때는 무용 작품의 길이와 진행에 따라 조선의 고전 음악인 <염양춘>의 원곡을 편곡해서 반주음악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jc, 2025/11/27; 2026/3/31)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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