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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931벌교

[최승희1931벌교공연] 5. 벌교리 875번지

1931126일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열렸던 극장은 <벌교구락부> 혹은 <벌교극장>이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 극장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진 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강점기에 <벌교극장>이 존재했다는 사실 조차 이번에 처음 재발견되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30129일자 <동아일보(3)><벌교구락부>의 신축 소식을 전하면서 그 위치를 당지(=벌교) 중앙지점인 신시장 하단이라고 보도했고, 1214일의 <조선일보(7)>공설극장신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벌교 신시장 인접지에다 ... 구락부식 공설극장을 신축했다고 전했다. 1210일자 <부산일보(7)>벌교극장 신축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기는 했지만 극장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벌교극장>의 위치를 알려주는 단서는 신시장 하단신시장 인접지라는 표현뿐이다. 1930년대의 벌교 주민이라면 이 정도의 서술로도 그 위치를 충분히 짐작했겠지만, 지금은 그 주소가 밝혀지지는 않는 한 위치를 특정하기가 어렵다.

 

<벌교극장(1930)>의 위치에 대한 다른 정보가 없으니 후대의 극장들을 조사해 소급하는 방법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그동안 필자는 한국의 극장들을 조사하면서, 새로운 극장은 대체로 이전의 극장자리를 이어받아 개축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위경혜의 <호남극장문화사(2007)>에 따르면 해방 후 벌교에 등장한 첫 극장은 1958년경에 소화다리 인근에 설립되었던 <벌교극장>이었고, 뒤이어 <현대극장(1961)><제일극장(1963)>이 문을 열었다. <벌교극장(1958)>은 임시로 가설된 노천 가설극장이었고, <현대극장><제일극장>은 건물을 신축해 개관한 실내 극장이었다고 한다.

 

 

<호남극장문화사(2007, 230)>에는 벌교읍 거리와 극장의 위치를 명시한 약도가 실려 있는데, 가설극장이었던 <벌교극장>은 소화다리와 홍교다리 사이의 공터, 제일극장은 현 <벌교 진마트>자리, <현대극장>은 벌교 새마을금고 건너편의 <대성의원> 자리였다.

 

<호남극장문화사>는 또 <현대극장>의 극장주가 장학사업을 하던 이길남씨라고 밝혔고, <제일극장>의 개관일은 1963311일로, 극장주는 씨 성을 가진 벌교우체국장과 벌교읍장이었던 김철수의 동생 김상수씨의 공동 경영이었다고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심지어 <제일극장>의 첫 상영작품은 <왕자 호동(1962, 한형모 감독)>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58년의 <벌교극장>은 노천 가설극장이었으므로 1930년의 <벌교극장>일 수 없었다. 더구나 <벌교극장(1958)>의 위치가 벌교 북촌의 홍교와 소화교 사이이므로, 이는 벌교 남촌의 신시장 인접지에 있었던 <벌교극장(1930)>과는 위치가 다르다. 그렇다면 <벌교극장(1930)>의 위치는 실내 극장이었던 <현대극장(1961)>이나 <제일극장(1963)>가 있던 자리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필자는 벌교의 유지이자 전통염색 예술가 한광석 선생님을 인터뷰하면서 <현대극장><제일극장>을 아시는지 물었고, “신시장 인접지에 있었다는 <벌교극장(1930)>이 해방 후의 두 극장 중에서 어느 위치에 부합하는지를 물었다.

 

한광석 선생님은 어린 시절 자주 영화 관람을 했던 두 극장을 잘 알고 계셨고, “신시장 인접지라면 <현대극장>이 그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셨다. 오늘날 <현대극장>의 지번 주소는 벌교읍 벌교리 875번지혹은 벌교읍 시장21번지였다.

 

지금은 <현대극장>도 폐관되어 <대성의원>으로 바뀌었는데, 그 주소가 벌교리 875-6번지였다. 시장2길을 따라 대성병원의 오른쪽에는 <현대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주차장의 상호가 현대인 것도 아마 이전의 <현대극장> 자리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확인을 위해 1916년에 발행된 토지조사대장과 지적원도를 찾아보았지만, 벌교리 875번지는 없었다. 지적원도에는 지번이 1번지부터 862번지까지만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대극장>이 있던 875번지와 <제일극장>이 있던 866번지는 1916년에는 주인이 없는 공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jc, 2022/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