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후반에 태동한 일본의 신무용은 1920-30년대 들어 사교댄스와 레뷰, 그리고 영화에 의해 그 존재기반인 관객층이 위협을 받았다. 이에 대해 예술무용계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1910년대에 신무용을 시작한 1세대 무용가들은 오락무용과 영화의 도전을 심각하지 않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신무용이라고 불리던 서양식 예술무용은 새로운 문물이었고 관객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유형이 조금씩 다른 일본의 1세대 무용가로는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 다카다 마사오(高田雅夫, 1895-1929)와 다카다 세이코(高田せい子, 1895-1977) 부부, 그리고 엘리아나 파블로바(Еле́на Па́влова, 1897-1941)가 있다.
이시이 바쿠는 사교댄스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도쿄가극좌와 도쿄오페라좌 시절에는 레뷰에 가까운 공연에 몸담았었다. 즉, 자신은 스스로 창작한 예술무용 작품을 상연했지만, 1918-1922년 그가 몸담았던 도쿄가극좌와 도쿄오페라좌의 공연은 전체적으로 레뷰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1916년 11월부터 1917년 2월까지 약 3개월 동안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무용교사로 재직한 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시이 바쿠는 1927년에 개봉된 <일촌법사(一村法師)>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즉, 예술무용에 정진하기 위해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을 사임하고 도쿄오페라좌를 해단하기는 했으나 영화 출연을 꺼리지는 않았고, 오히려 예술무용의 홍보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카다 부부는 제국극장 가극부 2기생으로 입단해 이탈리아인 죠반니 로시(Giovanni Vittorio Rossi, 1867-1940)의 지도로 발레 무대에 올랐고, 제국극장 이후에도 로시가 창단한 아카사카 로얄관에서 오페라를 계속했으나, 1919년 2월 로열관이 해산된 후, 쇼치쿠(松竹)가 창단한 아사쿠사 오페라 <신성가무극단(新星歌舞劇団)>과 1920년 9월 결성된 <네기시 대가극단(根岸大歌劇団)>에 참여했다. 즉, 초기 레뷰 공연에 참여한 바 있었던 것이다.
다카다 부부는 1922-1924년 유럽과 미국을 주유하며 무용을 연구한 뒤, 1924년 3월 <네기시 대가극단>을 해산하고 <다카다 무용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예술무용을 견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 마사오가 레뷰공연에서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과 경쟁하던 쇼치쿠악극부의 고문을 담당하기도 했다.

남편 마사오가 사망한 후 아내 다카다 세이코는 <다카다 무용연구소>를 계속하는 한편, 1932년부터 니카이도 도쿠요(二階堂トクヨ, 1880-1941)의 일본여자체육전문학교(오늘날의 일본여자체육대학)에서 서양무용을 지도하면서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후 최승희와 함께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최고 인기의 무용가로 꼽혔다.
즉 다카다 부부는 서양식 발레와 신무용을 견지하면서도 레뷰 성격의 아사쿠사 오페라와 쇼치쿠소녀악극부와는 긴밀하게 교류하고 협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영화계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엘리아나 파블로바는 러시아 태생의 발레리나로 1919년 7월에 러시아혁명을 피해 일본에 입국, 고베에서 일본 첫 공연을 하고, 10월에는 아사쿠사에서 6개국연합 가무음악단공연에서 <빈사의 백조( 瀕死の白鳥 )>를 처음 상연했다. 1921년에는 <마츠타케 키네마연구소>가 제작한 무성영화 <그대여 알지 못하는가( 君よ知らずや )>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잠시 일본을 떠났다가, 1925년에 돌아와 파블로바 발레단을 결성하고, 1927년 가마쿠라에 일본 최초의 발레연습장을 설립, 후학을 길렀다. 1933년 일본 귀화를 신청하고 1937년에 일본인이 되어 발레와 신무용 활동을 계속했으나 1941년 병사했다. 엘리아나 파블로바는 가마쿠라에 사교댄스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요컨대 일본의 1세대 서양식 신무용가들은 예술무용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소녀가극단이나 아사쿠사 오페라 등의 레뷰공연과도 교류했고, 영화 출연도 했으며, 사교댄스 교실을 열기도 했었다. 이는 예술무용의 영역이 일정한 정도로 보장되어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오락무용이나 영화계와도 거부감없이 교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3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2세대 신무용가들은 사정이 달랐다. 사교댄스에 이어 레뷰와 영화의 성장이 워낙 급속했기 때문에 예술무용의 입지가 현저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최대 규모였던 이시이 무용단을 보아도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1925년 이시이 바쿠가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후에 모집한 첫 제자들이 40명이었고, 이후 약 10년동안 양성한 무용연구소의 소원은 수백 명에 달했지만, 이중 예술무용가로 활동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시이 바쿠가 기대를 걸었던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와 이시이 에이코(石井栄子)는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아사쿠사 오페라 시절의 제자였던 강홍식과 무사시사카이(武藏境) 시절의 초기 제자 이시이 미에코(石井美笑子)은 영화배우로 전업했고, 지유가오카(自由ゲ丘)시절의 촉망받았던 아라키 요(荒木陽)는 쇼치쿠소녀가극의 교사로 취업했다. 서양식 발레에서 시작해 이시이 바쿠 문하에 들어왔던 타니 모모코(谷桃子)는 다시 발레로 회귀했다.

이시이 바쿠와 함께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까지 했던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는 독립 후에 창작과 공연보다는 무용학원을 운영하며 생계를 잇는 데에 급급했다는 후문인데, 그 점은 이시이 킨코(石井欣子)와 이시이 이쿠코(石井郁子)도 마찬가지였다.
예술무용을 이어가라는 이시이 바쿠의 기대에 부응했던 제자는 최승희와 이시이 미도리, 조택원과 칸미즈 다쿠시게(寒水多久茂)였는데, 그나마 조택원은 해방 후의 대한민국에서 무용가로 명맥을 유지했고, 칸미즈 다쿠시게는 일본에서 정상급 무용가로 떠오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의 제자 중에서 예술무용가로서 스승만큼의 명성을 이룬 사람은 최승희와 이시이 미도리 정도였다.

이는 예술무용이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험한 길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2세대 신무용 예술무용가들이 활동을 시작했던 1930년대의 무용계의 조건이 1세대에 비해 척박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시이 바쿠, 타카다 세이코, 엘리아나 파블로바 등의 무용 거장들의 문하로 많은 제자들이 무용에 입문했지만, 대부분 다른 길로 빠지곤 했다. 이에 대해 이시이 바쿠는 <개조(1934년 10월호)>에 기고한 “신진무용가를 말한다”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젊은 무용가 중 상당수는 지나치게 공을 너무 서두르는 듯하다. 무용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의에서가 아니라, 천박한 생각이나, 생활의 수단으로 무용을 배우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지, 반년이나 1년의 연습으로 바로 발표회를 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경향이다.”
이시이 바쿠의 경고와 제언은 현상적으로는 타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예술무용이 처했던 역경을 고려하면, 신진무용가들이 장기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창의적인 무용 활동에 전념하지 못한 것을 그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었다.
1세대의 대가들은 안정적으로 무용단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이 무용단에서 양성된 2세대 무용가들은 독자적인 무용단을 꾸리는 것이 어려워졌다. 무용단 운영이 어려워진 것은 1세대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들은 학교의 교육무용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시이 칸(石井歓, 1994:231)에 따르면, 이시이 바쿠는 1926년부터 문부성이 주최하는 전국소학교교원 무용강습회의 강사로 임명되어 학교의 무용교육으로 활동영역을 넓혔고 안정적인 수입을 늘릴 수 있었다. 이시이 바쿠는 제자들을 무용강습회의 조교로 채용해 급료도 지급할 수 있었다. 또 다카다 세이코는 1932년부터 일본여자체육전문학교(오늘날의 일본여자체육대학)의 서양무용 교수로 임명되었으므로, 안정적인 수입과 공연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가의 반열에 오른 1세대 신무용가들에게 부여된 공사립 초,중,대학교의 무용교육이나 무용강습의 기회가 2세대의 신진무용가들에게는 거의 제공되지 않았다.
따라서 신진무용가들은 무용단을 개설하고 제자들을 모아서 그들이 내는 수업료로 생활하고 공연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수강생이 충분하지 않으면 무용단을 운영하거나 공연을 계속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 생활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jc, 202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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