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예술무용계는 사교댄스와 레뷰의 오락예술의 성행으로 관객을 잃던 시기였다. 그러나 예술무용의 위기의 원인은 사교댄스와 레뷰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 시기 대중의 연예오락의 욕구는 영화로 대거 옮겨갔다.
1891년 5월20일 토마스 에디슨 연구소가 여성클럽 회원 150명을 초청, 3초짜리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 <딕슨의 인사(Dickson Greeting)>을 시연했고, 1894년 4월14일 홀랜드 형제는 뉴욕 브로드웨이와 27가 코너에 최초의 키네토스코프 상영관을 개업했다.
상영관에는 10개의 서로 다른 필름을 장착한 10대의 키노토스코프 상영기가 비치되었고, 5센트에 필름 1개를 볼 수 있었다. 필름은 에디슨 영화 연구소 <블랙 마리아(Black Maria)>가 촬영한 것으로 15-20초의 길이였다. 키네토스코프는 상자 속에서 돌아가는 필름을 작은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방식이었다.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는 1895년 3월22일 프랑스 산업개발협회원 약 2백명을 초청해 최초의 스크린 영사식의 영화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를 상영했고, 그해 12월28일에는 40명의 관객을 초청해 최초의 유료 영화 시연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흔히 영화의 탄생으로 간주된다.
일본에서는 1896년 11월25일 고베의 총포상 다카하시 노부하루(高橋信治)가 진코구락부(神港倶楽部)에서 에디슨식의 키네토스코프를 상영, 일본 ‘활동사진’ 상영의 첫 장을 열었다. 1897년 1월 이나바타 카츠타로(稲畑勝太郎)는 교토전등주식회사 본사 앞뜰에서 뤼미에르식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상영했고, 그해 2월15일에는 오사카에서 최초의 유료 시네마를 상영했다. 상연장은 난바(難波)의 미나미지(南地)연무장이었고 입장료는 일반석 10전, 특별석 20전이었다.
1898년 도쿄 코니시 사진공업사의 아사노 시로(浅野四郎)는 일본 최초의 단편영화 <바게지조(化け地蔵)>와 <죽은자의 소생(死人の蘇生)>을 촬영했고, 1899년에는 최초의 극영화 <게이샤의 손춤(芸者の手踊り)>을 도쿄 가부키자(歌舞技座)에서 개봉했다.
1903년 10월1일 요시자와상점(吉沢商店)이 아사쿠사공원 6구(浅草公園六区)에 일본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인 <텐키칸(電氣館)>을 개업했고, 1912년에는 요시자와 상점을 포함한 4개의 군소영화사가 합동으로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 즉 닛카츠(日活)을 발족시켰다.
1917년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夫)는 클로즈업과 카메라 이동, 컷백 등의 기법을 도입한 <대위의 딸(大尉の娘)>을 제작했는데, 이때부터 ‘활동사진’ 대신 ‘영화’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1918년 일본 영화의 근대화 운동인 <순영화극(純映画劇)운동>을 주도한 카에리야마 노리마사(帰山教正)는 <활동사진극의 창작과 촬영법>이라는 저서에서 “영화는 연극의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무대 각본을 시나리오, 여형(女形)을 여배우, 변사를 자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20년에는 영화사 쇼치쿠(松竹), 1930년에는 PCL이 설립되어 닛카츠와 함께 일본영화 초기의 3대 영화사가 각축하며 영화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쇼치쿠는 배우양성소를 설립해 다수의 배우, 특히 여배우를 배출해, 일본 영화 양산에 기여했다.
<일본영화 데이터베이스(http://www.jmdb.ne.jp/)>에 따르면, 1899년부터 1909년까지 11년동안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는 모두 376편(1년 평균 34편)이었으나, 1910년대(1910-1919)에는 총 2,926편(1년 평균 293)편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1920년대(1920-1929)에는 5,148편(1년 평균 515편)으로 2배 가깝게 늘어난 후, 1930년대(1930-1939)에는 5,427편(1년 평균 543편)으로 전기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이는 일본의 방화 제작 편수이며, 여기에 유럽과 미국에서 수입된 외화의 상영 편수를 합치면 당시 일본의 영화 상영 편수는 훨씬 늘어난다. 이렇게 영화 붐이 일어나고 관객이 영화로 쏠려감에 따라 무대공연, 특히 예술무용공연은 관객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예술무용 흥행의 위축은 사교댄스와 레뷰의 성행과 함께 영화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jc, 202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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