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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935다카라즈카

[다카라즈카1935공연] 10. 사교댄스와 댄스홀

앞에서 근대 일본의 예술무용과 오락무용이 사촌관계였다고 말했지만, 서양에서는 자매관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교댄스와 예술무용은 둘 다 상류층이 즐기던 춤이었기 때문이다. 둘 다 고급문화로서 사교댄스는 상류층이 직접 추며 즐기던 춤이었고, 예술무용은 상류층이 관람하던 춤이었다.

 

일본에서도 사교댄스와 예술무용은 시작부터 밀접한 관계였다. 우선 출발 시기가 같았다.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 1886-1965),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薰, 1881-1928)와 함께 무용시 운동을 시작한 것이 1916년이었는데, 일본의 첫 댄스홀 카게츠엔(花月園)이 요코하마 쓰루미(鶴見)에 등장한 것은 1917년이었다.

 

 

카게츠엔은 원래 레스토랑이었으나 댄스홀이 병설되었다가, 이내 댄스홀 전업으로 변신했다. 이후 사교댄스는 들불같이 번져서 1923년경 도쿄도에 56개소의 댄스홀이 개업했다.

 

카게츠엔 이전에도 사교댄스는 있었다. 1891년부터 제국호텔에서 천장절(=텐노 생일) 무도회가 열렸고, 1922년부터는 제국호텔 <라이트관>에서도 연례 무도회가 열렸다. 이 무도회는 황족과 귀족, 외교사절의 사교장이었고, 음악도 미뉴엣이나 왈츠 등의 서양 클래식 춤곡이었다.

 

 

상류층의 사교댄스를 대중오락으로 보급한 것이 댄스홀이었다. 카게츠엔은 일반인들이 남녀 동반으로 입장해 서양식 사교댄스를 즐겼던 댄스홀이었고, 이내 간사이로 확산되었다.

 

1920년 오사카의 남바(難波)에 카페 <코티지(コテージ)>가 개업했다. 술과 음료를 파는 카페였으나 댄스홀을 겸했는데, 1923년 전문 댄스홀로 변신했다. <코티지>가 성공하자 1924년 도톤보리(道頓堀)와 센니치마에(千日前)<파울리스타(パウリスタ)>, <유니온(ユニオン)>, <아카타마(赤玉)>등이 개업했다. <코티지> 이후 3년 동안 오사카에 20개소 이상의 댄스홀이 생겼다.

 

 

비슷한 방식으로 고베에도 댄스홀이 생겼다. 모토마치(元町)<소셜(ソシヤル) 댄스홀>, 나니와마치(浪花町)<다이야(ダイヤ) 구락부>, 산노미야쵸(三宮町)<캐피탈(キャピトル) 무도장>과 키타나가사도리(北長狭通)<하나쿠마(花隈) 댄스홀> 등이 그것이다.

 

상류층 무도회와는 달리 댄스홀의 음악은 재즈가 대종이었다. 오사카의 초기 댄스홀들은 레코드로 재즈 음악을 틀었지만,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직장을 잃은 도쿄의 재즈 밴드들이 옮겨와 간사이 댄스홀의 음악을 담당했다. 댄스홀의 중심지가 간토에서 간사이로 옮겨진 것이다.

 

 

1926년 말 오사카의 댄스홀들이 대대적인 규제를 받았다. 텐노가 사망해 장례 중인데도 댄스홀이 성업 중이었던 것이 당국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풍속을 해친다는 신문기사가 잇달아 보도되고, 경찰의 단속이 이어지면서, 오사카의 댄스홀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1926년 완성된 한신국도의 연변을 따라 효고현의 아마가사키로 댄스홀들이 옮겨갔다.

 

1927<아마가사키 댄스홀(尼崎ダンスホール)>을 시작으로 192811월에 <쿠이세(杭瀬) 댄스홀, 후에 타이거 댄스홀로 개칭>, 1930년에 <(キング)댄스홀><한신회관 댄스팰리스(阪神會館ダンスパレス)>가 차례로 개업하면서, 아마가사키가 일본 사교댄스의 중심지가 됐다.

 

 

아마가사키에서는 <댄스 시대><댄스 팬>이라는 월간 댄스잡지가 발행됐고, 매년 11월에는 4개 댄스홀의 합동으로 <아마가사키 댄스 축제>가 개최됐다.

 

간사이 댄스홀들은 독특한 영업방식을 개발했다. 요코하마의 <카게츠엔>을 비롯한 간토의 댄스홀에서는 입장객이 파트너를 대동해야 했지만, <코티지> 등의 오사카 댄스홀은 미리 여성 댄서를 고용해서, 남성들이 파트너를 대동할 필요가 없게 했다.

 

 

남성들은 댄스홀에 입장할 때 티켓을 구매하는데, 한 장에 20, 10장씩 묶은 회수권은 2엔이었고, 낮 시간에는 반값이었다. 음악이 시작되면 남성들은 댄스홀 앞쪽에 줄지어 앉아 기다리는 댄서에게 가서 티켓을 건네고, 댄서는 그 남성과 1곡의 춤을 추었다. 댄서는 티켓을 거절할 수 없었고, 같은 댄서에게 여러 명이 티켓을 건네면 댄서가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었다.

 

댄서들의 평균 연령은 22-3. 고급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은 모던 걸이었다. 춤을 잘 추고, 키가 큰, 미인 댄서에게 티켓이 몰렸다. 유명 댄스홀의 간판 댄서는 댄스 테크닉, 외모, 서비스가 일류여야 했다. 이들은 대기석에 앉는 자리부터 달랐다. 최고인기 댄서는 대기석에서도 중앙에 앉는데, 댄서들의 인기 순위는 전월의 티켓 판매량으로 정해졌다.

 

 

티켓 판매 수입은 60%가 댄스홀, 40%가 댄서 몫이었다. 댄서들의 수입은 월평균 7-80, 인기 댄서는 200엔을 벌었다. 참고로 1930년 남성 대졸 취업자 초임이 약 70엔이었다. 댄서는 같은 나이의 남성 최고 엘리트와 비슷한 수입을 올렸고 인기 댄서들은 그보다 3배를 벌었다.

 

댄서들이 고수입을 올린 것은 그만큼 댄스홀 고객이 많았기 때문이다. 댄서들보다 더 큰 몫을 가져간 댄스홀의 매출과 수익이 늘어난 것은 당연했다. 고수입과 고수익을 보호하기 위해 댄스홀들은 일부 인기 댄서들에게 상해보험에 들게 했다.

 

 

나는 20175월 최승희의 유럽공연을 취재하던 중 독일 쾰른의 무용박물관(Tanzmuseum des Deutschen Tanzarchiv Köln)에서 일본인 무용수의 사진을 발굴했다. 19301213일자 일간지 쾰르너 슈타트 안자이거(Kölner Stadt-Anzeiger)에 실린 이 사진은 AP통신사가 제공한 사진인데, 뒷면에는 영어와 독일어로 사진 설명이 타이핑 되어 있었다.

 

댄서의 이름은 우네 마사코(Une Masako), 아마가사키 댄스홀(Amagasaki Danse Hall)의 무용수(danseuse)였다. 우네 마사코가 AP통신사 기자의 주목을 받아 사진으로 촬영되고, 독일 신문에 게재된 까닭은 그녀가 자신의 다리를 2만엔(=2천 파운드)의 보험에 가입했기 때문이었다. 사진 설명에는 미국과 유럽의 여성이 다리를 보험드는 일은 자주 있었으나, 일본 여성이 다리 보험을 든 것은 처음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1930년의 2만엔은 오늘날의 약 77만달러(2015년 임금기준), 11억원에 해당한다. 당시 댄스홀의 무용수가 얼마나 높은 인기와 금전적 가치를 누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승희도 1929623일자 <별건곤(52)>과 가졌던 인터뷰에서 다리는 무용예술가에게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면서 유명한 무용가나 영화 여배우가 자기의 다리에 막대한 상해보험을 걸고 있는 것을 보아도 다리가 얼마나 부인의 형체미에, 또는 무용가나 배우에게 얼마나 귀중한 보물인 것을 알 수가 있다고 설명했다.

 

 

최승희 자신도 보험에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오빠 최승일은 1937615일의 <동아일보(7)>와의 인터뷰에서 교토에서 최승희씨를 습격했던 청년은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곧 나왔지요. 그리고 승희가 도쿄에 가면서 나고야에서 내려가지고 그 사람도 만나보고 그 청년의 습격한 원인이 보험금 때문임으로 보험에 몇 천원 들었지요.”

 

습격 사건이란 교토 공연 중에 발생한 사건을 가리킨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193723, 11)>에 따르면, 22일밤 최승희가 교토다카라즈카 극장에서 공연하던 중, 단도를 든 청년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와 자살 소동을 벌이다가 극장원에 체포되어 경찰서로 넘겨졌다.

 

 

경찰은 이 청년이 교토제국대학 법대출신의 하야시 히로유키(林寬行, 26), 범행 당시 미츠이생명보험회사(三井生命保險會社) 외판원으로 재직 중이었으며, 나고야 공연 때부터 보험 권유를 구실로 최승희에게 꽃다발을 보내면서 면회를 간청하는가 하면, 126일에는 출연자 대기실로 쳐들어와 구애한 적도 있었다고 발표했다.

 

하야시 히로유키는 신원과 직업이 확실하고 위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훈방된 것으로 보이며, 최승희는 그를 만나 보험에 가입해 주었다는 것이다. 인터뷰에서 최승일은 이 보험이 어떤 보험이었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그게 만일 상해보험이었다면, “다리가 나의 보물이라고 했던 최승희가 자신의 다리를 상해보험에 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보험은 몇 천원으로 7년전 아마가사키 댄스홀의 우네 마사코가 들었던 2만원의 상해보험에 미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상황이기는 하지만, 1930년대 사교 댄스홀 무용수가 예술무용가보다 훨씬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jc, 202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