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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935다카라즈카

[다카라즈카1935공연] 9. 예술무용과 오락무용

최승일이 편집한 <최승희 자서전(1937:59)>에 따르면 최승희가 19298월경 3년반의 일본 무용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면서 오빠 최승일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 바 있었다. 석정 선생은 요사이 그가 창작한 무용에는 시()가 없어요. 그는 돈을 생각해요.”

 

 

제자가 스승에 대해 이처럼 직격 비판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는 실수나 오해때문은 아니었다. 최승희는 같은 편지에서 이시이 바쿠의 무용을 다음과 같이 더욱 구체적이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전략- 오빠! 저는 요사이 무용예술이란 어떠한 것이라는 것과 예술가의 양심이라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그것은 이런 데서 발견이 됩니다. 석정선생이 처음 독일에서 돌아와 산전경작(山田耕莋)씨의 반주로 안무된 작품과 요사이 만드는 작품의 차이가 왜 그다지도 그 정신 그 감흥이 다릅니까? 저는 차차 석정선생에게 환멸을 느끼어갑니다. 요사이 그의 예술에는 시()가 없어요. 그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는 춤을 추어서 수십명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집이 없으니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인제는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은 요사이 마치 광솔불과 같이 탑니다.”(최승일, 1937:52)

 

예술무용의 세계에 뛰어들어 이제 막 불이 붙은 최승희의 눈에 스승 이시이 바쿠의 무용의 변질은 환멸로 보였다. 이시이 바쿠가 무용단을 유지할 돈을 벌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더 이상 창작의 에너지를 동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이때 만17세의 최승희가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춤 세계에서 관객이 예술무용에서 오락무용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예술무용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시이 바쿠가 무용시 운동을 시작했던 1916년에는 오락무용과 예술무용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둘 다 일본 전통무용과는 구별되는 서양무용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1917224일의 오사카 치카마츠자(近松座) 공연으로 이시이 바쿠의 무용시 운동이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기 시작하자, 그는 도쿄로 돌아가 191710<도쿄가극좌(東京歌劇座)> 활동을 시작했고, 19189월에는 독자적으로 <도쿄오페라좌>를 결성해 활동을 확대했다.

 

 

당시 아사쿠사의 오페라는 정식 오페라가 아니라 소규모의 오페레타였고, 신기한 동작과 기괴한 스토리, 그리고 여배우들의 성적 매력에 의존하는 통속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인기가 오르고 돈도 벌게 됐지만,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무용에 대해 고민했다.

 

관객에게 영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혼을 표현하는 무용예술에서 멀어지고, ... 인기에 취해 통속적인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미도리카와 준, 綠川潤, 2006: 57-58)

 

그는 19215, 고베 슈라쿠칸(聚楽館) 공연을 끝으로 <도쿄오페라좌>를 해산, 창작에 몰두해 작품을 준비한 뒤, 1922-1925년 신무용의 본고장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을 떠났다. 순회여행에서 돌아와 19263월 경성 공연에서 최승희를 매혹시켰을 때의 이시이 바쿠는 예술무용의 정신으로 충만했고, 최승희가 제자에 입문한 것도 그 예술적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가 이시이무용단에서 수련하는 기간(1926-1929)에 일본의 춤 문화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도쿄와 오사카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사교댄스가 유행하고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레뷰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술무용가 이시이 바쿠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지방 공연을 늘리는 방법으로 대처했지만 수입은 늘지 않았다. 관객들은 직접 춤을 추는 사교댄스나 화려하고 흥미로운 소녀가극단의 레뷰 공연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한때 사촌이었던 오락무용과 예술무용은 점점 구별되면서 멀어졌고,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면서 예술무용의 존재 근거가 무너지고 있었다.

 

 

최승희는 조선에서 자신의 무용단을 운영하면서 비로소 스승의 고충을 이해했을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상황은 달랐지만, 최승희는 관객의 관심이 멀어졌을 때 예술무용가가 얼마나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는지 깨달았다.

 

이때부터 최승희는 예술무용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관객을 공연장에 모여들게 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라는 점을 인식했을 것이다. (jc, 202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