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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2025길-홍범도

[유준2025길] 22. 쇼펜하우어 예술론과 <누이(2024)>

새벽에 읽는 쇼펜하우어, 그의 <예술에 대하여>가 공감을 줍니다. 내가 이 사람한테 이렇게 감탄하게 될 줄이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초간단 정리하면, 이 세상은, 결핍에서 욕망이 일고, 욕망을 이루기 위한 의지가 충돌하는 곳이라는 거죠. 이런 북새통에서도 평화와 만족을 주는 예외적인 장치가 있는데, 그게 예술입니다.

 



예술은 욕망에 사로잡힌 개인들을 잠깐 멈추게 하고, 중구난방의 의지를 내려놓은 다음 잠시나마 세상을,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예술을 대하는 순간 개인들이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평화와 만족, 심지어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게 바로 예술의 본분이자 기능이라는 건데... 그 본분을 다하면 예술, 못하면 오락이라는 것이죠. 제대로 된 예술을 설명하면서 쇼펜하우어는 괴테를 인용합니다. "어지러운 인생도 그림으로 그리면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 길지 않은 <예술에 대하여>는 6개의 절로 이뤄져 있는데, 2절의 대부분이 시와 희곡, 즉 문학에 대한 이야기고 마지막에 그림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 이어서 3,4절에서 음악을 이야기 하죠.

5,6절에서 예술의 두 가지 구성 요소로서의 의미(=미)와 재미(=흥미)의 관계에 대해서 모든 장르의 예를 들어가면서 길게 설명을 늘어놓고 있긴 한데...

제 관심이 끌린 곳은 2,3,4절입니다. 문학이 그림을 징검다리로 음악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인데, 이건 쇼펜하우어가 이 글을 쓸 때 그런 사유의 과정을 거쳤다는 뜻이겠죠.

 



이게 흥미로웠던 것은 제가 좋은 그림을 볼 때 자주 음악을 떠올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문학)에서 출발한 그림이 때로 머리 속에 음악을 유발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거든요.

최근에 감상했던 유준 화백의 <길>전을 떠올려봅니다. <삶(2022)>이라는 작품은 히말라야의 아마다블라봉 위에 고래가 헤엄치는 그림인데,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볼레로(Bolero)가 연주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다블람은 수면 아래 3천미터에서 지상 7천미터까지 솟아오르는 데에 약 7천만년이 걸렸다고 하니까요. <삶>에는 7천만년 전의 고래와 오늘날의 아마다블람이 동시에 묘사되어 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느리고 점진적이었을런지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죠.

<볼레로>를 듣다보면 거의 들리지 않는 드럼과 플룻으로 시작해서15분 후에는 온갖 현과 우드와 브라스와 퍼커션이 총동원된 풀오케트스트라가 클라이맥스를 연주하죠. 그런데 그 15분 동안 연주되는 멜로디는 같습니다. 단순하지만 반복되면서 변주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유준의 <삶>은 라벨의 <볼레로>와 함께 감상하면 최상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내가 속한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왔는지를 상징적이지만 동시에 명시적으로 알려주는 콤보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경사가 30도는 족히 되어보이는 아마다블람을 기어 올라가고 있는, 욕구와 의지에 가득찬 한 사람을 보고 있자면, 유준 작가가 왜 이 작품의 제목을 <삶>이라고 붙였는지가 자명해 집니다.

 



한편, 유준 화백의 <누이(2024)>를 볼 때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들리는 듯 하더군요. 굳이 "옛날식 다방"이라든가 "도라지 위스키"라는 추억돋는 노랫말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쿠터를 타고 도착해서 보온병에 싸온 커피를 잔에 부어주는 '누이'가 "짙은 립스틱에 나름 멋부린 마담"도 아닌 것 같고,

아직도 이불 속에 누워서 화면에 콧배기도 보이지 않는 BT새끼가 "짙은 색소폰 소리"에 취한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그것은 <누이>의 모습이 "실연의 달콤함" 같은 낭만적인 느낌을 주기 보다는, "왠지 한 곳이 빈 것 같은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상기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다방 아가씨를 유준 화백은 "누이"라고 부르고 있는 거죠.

 



암튼 오늘은 동트기 전에 읽은 쇼펜하워의 예술론과 벌써 한 달이 지나버린 유준 작가의 <길>전에 대한 회상이 겹치는 가운데, 급땡기는 커피를 내리면서 하루를 시작하게 되네요. 축, 삼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