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호쿠2023취재

[도호쿠2023취재] 44. 최승희 탄생일 (9) 22개 문헌

9. 22개 문헌 기록의 재검토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으로는 19111224, 양력으로는 1912211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생년월일이 <자료4>에 나타난 여러 문헌의 다양한 기록을 모두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연대순으로 정리된 이 기록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1)번의 최준현의 민적 기록(1912)은 민적 계원의 실수로 야기된 오류였다. 1224일이 1124일로 잘못 기록된 것이다. (2)번의 숙명여학교 학적부 기록(1922)과 그것이 수정된 사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학적부 작성 당시 최승희의 생일은 1224일로 옳게 기록됐지만, 민적의 날짜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후에 잘못된 민적의 날짜로 수정되었다.

 

(3)의 남편 안막의 민적(1931)은 필자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6)의 여권신청서(1937)의 생일이 19111224일로 제대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부친 최준현의 민적의 오류가 남편 안막의 민적에서는 바로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4)<만슈니치니치신문(1935)>이 최승희를 “1912년생으로, (5)<반도의 무희(1936)>의 영화설명 레코드(1936)가 최승희의 생일을 “19121이라고 서술한 것은 올바른 서술이었다. 후자는 생년과 함께 생월까지 밝힌 것이 특이한데, 최승희의 1935년의 음력생일(1224)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936118일이었다. , 이 서술의 저자는 조선식 음·양력 변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7)의 샌프란시스코 입국기록에서 최승희가 1938111일을 기준으로 자신이 만25세라고 밝힌 것도 올바른 서술이다. 최승희의 양력 생년월일이 1912211일이므로, 샌프란시스코 하선 당시의 만나이는 25(+11개월15), 26세가 되기에 15일이 모자랐다.

 

(8)의 벨기에 노동허가서와 (10)의 멕시코 입국신청서의 “1912년 출생이라는 기록도 올바른 양력 생년이고, (9)의 뉴욕입국 기록에 28라고 기입한 것도 정확한 서술이다. 즉 최승희의 생일이 양력 1912211일이므로 뉴욕 입국일인 1940426일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만28(+215)이었기 때문이다.

 

 

(11)<로동신문>“1912년생은 양력 생년으로 올바른 서술이었고, (12)의 서만일의 서술은,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양력 생년(1912)과 음력 생일(1224)을 단순 조합한 오류였다. (14)의 강이향이 최승희의 생년을 1911년이라고 밝힌 것은 그것이 음력 생년을 가리킨다면 맞지만 양력 생년을 가리킨 서술이라면 오류이다.

 

최승희의 생년을 “1913이라고 서술한 (13)의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郞, 1911-1993)의 서술은 뜻밖이다.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최승희-안막 부부와 절친한 사이였다. 1910년생인 안막은 와세다(早稲田)대에서 러시아 문학, 1911년생인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호세이(法政)대에서 일본 문학, 1912년생인 최승희는 이시이 무용연구소에서 신무용을 공부했다.

 

 

세 사람은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과 그 이후의 일본공연 과정에서 더욱 가까워졌다. 안막과 최승희는 당시 <중앙공론>의 편집부 기자였던 다카시마 유사부로에게 세계 순회공연 중에 있었던 비밀스런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그런 특종감을 기사화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1992101, 최승희 평전을 준비하던 정병호와 대담한 적이 있는데, “최승희씨를 다시 만나지 않고서는 죽을 수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최승희 부부와 가까웠던 다카시마 유사부로가 최승희의 생년을 1913년으로 잘못 서술한 것은 의외였다.

 

짐작컨대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음력과 양력을 병용하는 조선인들의 관행과 그 이유를 잘 알고 존중했을 것이다.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안막-최승희 부부와 함께 어울리면서 안막은 자신보다 한 살 위이고 최승희는 자신보다 한 살 아래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최승희가 1912년생이라고 옳게 판단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음력 생년이라고 착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양력 생년으로 환산해 1913년이라고 서술했던 것이다.

 

(15)의 정병호의 평전과 그 이후 정병호의 서술을 그대로 이어받아 최승희의 생년월일을 19111124일로 서술한 (16)-(22)의 평전들과 묘비와 연보작성자는 모두 이 문제에 관한한 오류에 빠져 있었으면서도 정설로 취급되어 왔던 것이다.

 

최승희의 생년월일을 둘러싼, 오류로 판명된 정설이 주는 교훈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그 자료가 적실한 자료인지 검토하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연구자의 서술을 인용할 때는 그것이 정말로 인용할 만한 정확한 서술인지를 거듭 확인해야 할 뿐 아니라, 자료 발굴자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라도 마땅한 인용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점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