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2월6일의 <벌교극장> 공연은 벌교에서 열린 최승희의 처음이자 마지막 무용공연이었다. 이 공연이 <벌교구락부>의 회관이었던 <벌교극장>에서 열린 것으로 보아, 이는 <벌교구락부>의 초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은 1930년 12월6일 개관된 <벌교극장> 개관 1주년 기념일이었으므로, 최승희의 공연은 이 극장의 개관1주년 기념공연이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1929년 12월5일 <조선극장>에서 찬영회가 주최한 무용,연극,영화의 밤에서 첫 발표회를 가진 이래 벌교공연까지 만2년 동안 8회의 경성 공연과 46회의 지방공연을 단행했다. 벌교공연은 1931년의 31번째의 지방공연이자 통산 46번째 지방공연이었다.
최승희는 지방공연 중에도 새 작품을 안무해 초연하기도 했다.
1931년 2월21일의 춘천공연에서 초연된 <엘레지의 독무>, 1935년 10월26일의 고베공연에서 초연된 <샘물터에서(泉のほとり)>가 그 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방순회공연에서는 그 직전의 경성공연에서 발표된 신작을 재연하는 것이 관행이었고, 벌교공연의 연목도 이 관행에 따라 1931년 9월1-3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경성 제4회 공연의 작품들이 주로 상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일부 지방공연에서는 직전 수도권 공연뿐 아니라 그 이전에 발표됐던 인기작품을 상연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최승희의 첫 오사카 공연(1935년 10월25일, 아사히회관)에서는 사흘 전의 도쿄 제2회 공연(1935년 10월22일)에서 초연된 작품이 주로 상연되었지만, 그보다 1년전의 도쿄 제1회공연(1934년 9월20일,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에헤야 노아라>와 <희망을 안고서>, <검무>와 <승무>도 상연했다. 최승희는 이 대표작 혹은 인기 작품들을 보지 못했던 오사카의 관객들을 위해 1년 전의 작품들도 연목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벌교공연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즉, 최승희는 1929년 12월부터 1931년 9월 이전까지 경성에서 발표됐던 과거의 인기작품과 대표작을 벌교공연 연목에 포함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최승희의 과거 대표작으로는 <인도인의 비애(1929)>, <영산무(1930)>,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1930)>, <광상(1931)>, <우리의 캐리커처(1931)> 등을 꼽을 수 있다.
앞에서 최승희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반주음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인도인의 비애(1929)>를 예로 든 바 있다. 이 작품은 최승희의 첫 현대무용 창작이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대표작이다.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은 <인도인의 비애>가 처음 안무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너, 생각나니? 깊은 밤 고요한 방에 너는 내 앞에서 크라이슬러의 ‘인디안 라멘트’를 눈물을 흘려가면서 안무하던 것을 말이야. 우리는 그날 밤에 러시아로 가려던 정열을 <인디안 라멘트> 멜로디 위에 얹었었다.” (최승일, <최승희 자서전(1937:53)>)
이 기록에 러시아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인도인의 비애>가 창작된 시기는 1929년 9-10월이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1929년 8월25일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러시아 유학을 추진했으나 좌절된 바 있다. 이 작품은 찬영회 주최의 무용연극영화의 밤 공연(1929년 12월5일, 조선극장)에서 초연됐다.
최승희는 <인도인의 비애>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는데, 자신의 처녀작인데다가 안무 의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삼천리> 1930년 7월호에는 “예술가의 처녀작”이라는 주제로 열린 좌담회가 실렸는데, 최승희는 자신의 초기 작품을 <방아타령>과 <인도인의 비애>, <길군악>의 세 개를 들었고, 그중 <인도인의 비애>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중에 제일 자신이 있는 것은 <인도인의 비애>예요. 이것은 우리네들 사이에- 가령 어린 아가씨나 도련님이나 늙으신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속에 언제든 흐르고 있는 그 슬픔, 비록 자기 가슴에는 없는 듯 하다가도 언제 한번은 솟고야 마는 그 공통한 슬픔! 일관한 비애, 그것을 모든 조선 사람의 가슴 속에서 끄집어내어 표현하려고 한 것이랍니다. 어째서 하필 ‘인도인’의 비애라고 하였냐고요? 무얼, 그야 아시면서...”
이 인용문에 나타난 최승희의 자문자답이 인상적이다. “우리네들 사이에 ... 흐르고 있는 그 슬픔...을 모든 조선 사람의 가슴 속에서 끄집어내어 표현”한 작품에, 어째서 “인도인”의 비애라는 제목을 붙였는가? 최승희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그 답을 안다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최승희가 굳이 밝히지 않은 의중은 다음의 세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첫째, 이 작품의 반주음악이 <인디언 비가(Indian Lament)>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G장조(작품번호 100번)”의 제2악장 G단조의 라르게토(Larghetto)이다.
드보르작은 1892-1895년 미국에 체재하면서 미국의 음악가들에게 흑인과 인디언의 음악을 포함해야 미국의 음악적 특징이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 자신이 흑인 영가와 인디언 전통음악을 수집하고 자신의 작품에 포함시키곤 했다. 그의 <심포니 9번 신세계교향곡(Op.95, 1893)>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미국 체재 중 드보르작은 대부분 뉴욕에 거주했지만, 1893년 여름에 아이오아주 스필빌(Spillville, Iowa)을 방문했다. 이때 그는 인근 지역을 폭넓게 방문하면서 인디언 음악을 수집했는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G장조(Op100)>는 그가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인근의 미네하하 폴즈(Minnehaha Falls)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작품화한 것이다.
그해 가을 뉴욕에 돌아온 드보르작은 11월19일부터 12월3일까지 이 작품을 완성했고, 이듬해(1894년) 베를린의 심로크(Simrock) 출판사가 출판됐다. 이 작품의 제2악장은 애조 띤 느린 멜로디로, 많은 연주가들과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프릿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52)가 편곡한 작품이 널리 연주되었다.
크라이슬러(바이올린)는 1914년에 피아니스트 빈센트 오브라이언(Vincent O'Brien, 1871-1948, 피아노), 1928년에 피아니스트 칼 람슨(Carl Lamson)과 <인디언 비가>를 연주, 빅터레코드사에서 녹음했는데, 1928년의 연주가 명연주로 꼽히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최승희가 <인도인의 비애(1929)>를 안무했을 때도 1928년의 연주를 반주음악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드보르작-크라이슬러의 <인디언 비가>가 백인에게 땅과 말과 역사를 빼앗긴 아메리카 인디언의 슬픔을 표현했던 것처럼,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 <인도인의 비애>가 일본에 땅과 말과 역사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슬픔을 표현한 것임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작곡자인 드보르작은 이 작품에 <인디언 비가>라는 제목을 붙인 바 없었고, 단지 미네하하 폴즈에서 목격한 빛의 변화를 묘사한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을 뿐이었다. <인디언 비가>라는 제목은 출판사 <심로크>가 작곡자와의 협의 없이 자의적으로 붙였던 것인데, 이를 크라이슬러가 채택하여 널리 유포한 것이다.
셋째, 최승희의 <인도인의 비애(1929)>는 찬영회의 무용연극영화의 밤 공연(1929년 12월5일, 조선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제1회 경성공연(1930년 2월1-2일, 경성공회당)과 제3회 경성공연(1931년 1월10-12회, 단성사)에서도 상연됐고, 도쿄 제1회공연(1934년 9월20일, 일본청년관)에서도 재연됐다.
도쿄 공연에서는 작품의 제목을 <바루타의 여인(バルタの女)>으로 바꾸었는데, ‘바루타’는 인도의 불교설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이다. 이 설화는, 가난하지만 깊은 불심을 가진 바루타가 어렵게 마련한 적은 기름으로 부처님을 위한 등불이 밤새 꺼지지 않게 해 칭찬과 상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설화는 ‘난타설화’로 알려져 있지만, ‘바루타’는 ‘난타’의 다른 이름이다.
이 작품도 반주 음악으로 드보르작-크라이슬러의 <인디언 비가(1914)>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바루타의 여인(1934)>은 <인도인의 비애(1929)>를 개명, 혹은 개작한 것이 분명하다.
최승희는 <인도인의 비애(1929)>를 <바루타의 여인(1934)>로 개명, 개작함으로써, 미국에 의해 수난을 당한 아메리카 인디언과 영국의 억압을 받고 있는 아시아 인도인의 슬픔을 중의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의 슬픔을 빗대어 표현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jc, 202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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