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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931벌교

[최승희1931벌교공연] 20. 인도인의 비애

1931126일의 <벌교극장> 공연은 벌교에서 열린 최승희의 처음이자 마지막 무용공연이었다. 이 공연이 <벌교구락부>의 회관이었던 <벌교극장>에서 열린 것으로 보아, 이는 <벌교구락부>의 초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은 1930126일 개관된 <벌교극장> 개관 1주년 기념일이었으므로, 최승희의 공연은 이 극장의 개관1주년 기념공연이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1929125<조선극장>에서 찬영회가 주최한 무용,연극,영화의 밤에서 첫 발표회를 가진 이래 벌교공연까지 만2년 동안 8회의 경성 공연과 46회의 지방공연을 단행했다. 벌교공연은 1931년의 31번째의 지방공연이자 통산 46번째 지방공연이었다.

최승희는 지방공연 중에도 새 작품을 안무해 초연하기도 했다.

 

 

1931221일의 춘천공연에서 초연된 <엘레지의 독무>, 19351026일의 고베공연에서 초연된 <샘물터에서(のほとり)>가 그 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방순회공연에서는 그 직전의 경성공연에서 발표된 신작을 재연하는 것이 관행이었고, 벌교공연의 연목도 이 관행에 따라 193191-3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경성 제4회 공연의 작품들이 주로 상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일부 지방공연에서는 직전 수도권 공연뿐 아니라 그 이전에 발표됐던 인기작품을 상연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최승희의 첫 오사카 공연(19351025, 아사히회관)에서는 사흘 전의 도쿄 제2회 공연(19351022)에서 초연된 작품이 주로 상연되었지만, 그보다 1년전의 도쿄 제1회공연(1934920,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에헤야 노아라><희망을 안고서>, <검무><승무>도 상연했다. 최승희는 이 대표작 혹은 인기 작품들을 보지 못했던 오사카의 관객들을 위해 1년 전의 작품들도 연목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벌교공연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 최승희는 192912월부터 19319월 이전까지 경성에서 발표됐던 과거의 인기작품과 대표작을 벌교공연 연목에 포함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최승희의 과거 대표작으로는 <인도인의 비애(1929)>, <영산무(1930)>,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1930)>, <광상(1931)>, <우리의 캐리커처(1931)> 등을 꼽을 수 있다.

 

 

앞에서 최승희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반주음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인도인의 비애(1929)>를 예로 든 바 있다. 이 작품은 최승희의 첫 현대무용 창작이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대표작이다.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은 <인도인의 비애>가 처음 안무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생각나니? 깊은 밤 고요한 방에 너는 내 앞에서 크라이슬러의 인디안 라멘트를 눈물을 흘려가면서 안무하던 것을 말이야. 우리는 그날 밤에 러시아로 가려던 정열을 <인디안 라멘트> 멜로디 위에 얹었었다.” (최승일, <최승희 자서전(1937:53)>)

 

이 기록에 러시아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인도인의 비애>가 창작된 시기는 19299-10월이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1929825일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러시아 유학을 추진했으나 좌절된 바 있다. 이 작품은 찬영회 주최의 무용연극영화의 밤 공연(1929125, 조선극장)에서 초연됐다.

 

최승희는 <인도인의 비애>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는데, 자신의 처녀작인데다가 안무 의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삼천리> 19307월호에는 예술가의 처녀작이라는 주제로 열린 좌담회가 실렸는데, 최승희는 자신의 초기 작품을 <방아타령><인도인의 비애>, <길군악>의 세 개를 들었고, 그중 <인도인의 비애>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중에 제일 자신이 있는 것은 <인도인의 비애>예요. 이것은 우리네들 사이에- 가령 어린 아가씨나 도련님이나 늙으신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속에 언제든 흐르고 있는 그 슬픔, 비록 자기 가슴에는 없는 듯 하다가도 언제 한번은 솟고야 마는 그 공통한 슬픔! 일관한 비애, 그것을 모든 조선 사람의 가슴 속에서 끄집어내어 표현하려고 한 것이랍니다. 어째서 하필 인도인의 비애라고 하였냐고요? 무얼, 그야 아시면서...”

 

이 인용문에 나타난 최승희의 자문자답이 인상적이다. “우리네들 사이에 ... 흐르고 있는 그 슬픔...을 모든 조선 사람의 가슴 속에서 끄집어내어 표현한 작품에, 어째서 인도인의 비애라는 제목을 붙였는가? 최승희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그 답을 안다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최승희가 굳이 밝히지 않은 의중은 다음의 세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첫째, 이 작품의 반주음악이 <인디언 비가(Indian Lament)>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G장조(작품번호 100)”의 제2악장 G단조의 라르게토(Larghetto)이다.

드보르작은 1892-1895년 미국에 체재하면서 미국의 음악가들에게 흑인과 인디언의 음악을 포함해야 미국의 음악적 특징이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 자신이 흑인 영가와 인디언 전통음악을 수집하고 자신의 작품에 포함시키곤 했다. 그의 <심포니 9번 신세계교향곡(Op.95, 1893)>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미국 체재 중 드보르작은 대부분 뉴욕에 거주했지만, 1893년 여름에 아이오아주 스필빌(Spillville, Iowa)을 방문했다. 이때 그는 인근 지역을 폭넓게 방문하면서 인디언 음악을 수집했는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G장조(Op100)>는 그가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인근의 미네하하 폴즈(Minnehaha Falls)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작품화한 것이다.

 

그해 가을 뉴욕에 돌아온 드보르작은 1119일부터 123일까지 이 작품을 완성했고, 이듬해(1894) 베를린의 심로크(Simrock) 출판사가 출판됐다. 이 작품의 제2악장은 애조 띤 느린 멜로디로, 많은 연주가들과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프릿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52)가 편곡한 작품이 널리 연주되었다.

 

 

크라이슬러(바이올린)1914년에 피아니스트 빈센트 오브라이언(Vincent O'Brien, 1871-1948, 피아노), 1928년에 피아니스트 칼 람슨(Carl Lamson)<인디언 비가>를 연주, 빅터레코드사에서 녹음했는데, 1928년의 연주가 명연주로 꼽히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최승희가 <인도인의 비애(1929)>를 안무했을 때도 1928년의 연주를 반주음악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드보르작-크라이슬러의 <인디언 비가>가 백인에게 땅과 말과 역사를 빼앗긴 아메리카 인디언의 슬픔을 표현했던 것처럼,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 <인도인의 비애>가 일본에 땅과 말과 역사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슬픔을 표현한 것임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작곡자인 드보르작은 이 작품에 <인디언 비가>라는 제목을 붙인 바 없었고, 단지 미네하하 폴즈에서 목격한 빛의 변화를 묘사한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을 뿐이었다. <인디언 비가>라는 제목은 출판사 <심로크>가 작곡자와의 협의 없이 자의적으로 붙였던 것인데, 이를 크라이슬러가 채택하여 널리 유포한 것이다.

 

 

셋째, 최승희의 <인도인의 비애(1929)>는 찬영회의 무용연극영화의 밤 공연(1929125, 조선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1회 경성공연(193021-2, 경성공회당)과 제3회 경성공연(1931110-12, 단성사)에서도 상연됐고, 도쿄 제1회공연(1934920, 일본청년관)에서도 재연됐다.

 

도쿄 공연에서는 작품의 제목을 <바루타의 여인(バルタの)>으로 바꾸었는데, ‘바루타는 인도의 불교설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이다. 이 설화는, 가난하지만 깊은 불심을 가진 바루타가 어렵게 마련한 적은 기름으로 부처님을 위한 등불이 밤새 꺼지지 않게 해 칭찬과 상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설화는 난타설화로 알려져 있지만, ‘바루타난타의 다른 이름이다.

 

 

이 작품도 반주 음악으로 드보르작-크라이슬러의 <인디언 비가(1914)>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바루타의 여인(1934)><인도인의 비애(1929)>를 개명, 혹은 개작한 것이 분명하다.

 

최승희는 <인도인의 비애(1929)><바루타의 여인(1934)>로 개명, 개작함으로써, 미국에 의해 수난을 당한 아메리카 인디언과 영국의 억압을 받고 있는 아시아 인도인의 슬픔을 중의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의 슬픔을 빗대어 표현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jc, 2025/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