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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935다카라즈카

[다카라즈카1935공연] 3. 다카라즈카 공연

최승희의 <이케니에(生贄)> 공연 사진을 배경으로 두 개의 리사이틀을 명시한 19351025일의 오사카공연 팜플렛 사진을 둘러싼 의문은 뜻밖의 자료가 풀어주었다. 그것은 이듬해(1936) 310일에 발행된 <최승희팜플렛 제2>이었다.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홍보하기 위해 발행된 이 화보집에는 각 분야의 문화예술가와 평론가들이 기고한 평론과 함께, 최승희의 무용사진들이 다수 게재되어 있는데, 맨 마지막 면에는 최승희의 공연일지도 정리되어 있다.

 

이 공연일지에 따르면 1935119일 다카라즈카 대극장(宝塚大劇場)에서 개최된 공연이 오사카 제2회 발표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 다카라즈카 공연을 오사카 두 번째 공연이라고 서술한 것이다.

 

 

물론 이는 최승희 측의 착오이다. 다카라즈카는 오사카시()나 오사카부()가 아니라, 효고현()의 도시이다. 그러나 이같은 지리적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카라즈카가 오사카부의 도시라고 생각하거나, 아예 오사카시의 일부라고 여겼을 수는 있다. 다카라즈카는 오사카에서 자동차로 30분이면 이동할 수 있고, 대중교통으로도 1시간 이내의 거리이다.

 

1930년대의 다카라즈카는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진 관광지였다. 온천과 놀이공원을 포함해 많은 유흥시설을 갖춘 곳으로 연간 방문객이 1천만명이 넘었다. 1935년의 일본 인구가 약 7천만명이었으므로, 인구의 7명중 한 명이 일 년에 한 번 이상 다카라즈카를 방문했다는 뜻이다.

 

다카라즈카는 소녀가극단으로도 유명했다. 1913년 다카라즈카 창가대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소녀가극단은 19144월 첫 공연을 가지면서 오락무용극 즉 레뷰의 시대를 열었다. 193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활동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이후 유사한 성격의 가극단이 양산되었으나, 1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은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유일하다.

 

 

전국적 유원지였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다카라즈카를 잘 알고 있었겠지만, 이 도시가 효고현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다카라즈카는 1935년 당시 시로 승격되지 못했고, 주소도 효고현 카와베군() 다카라즈카정()”이었다.

 

다카라즈카가 시로 승격한 것은 1954년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이 더 지난 후에야 카와베군의 다카라즈카정이 무코군의 요시모토촌과 합병해서 다카라즈카시가 된 것이다. 이같은 사정으로 1930년대에는 다카라즈카는 효고현의 독자적인 도시로 기억되기 보다는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사카의 인근지역으로 기억되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와 안막이 다카라즈카 공연을 기획할 때에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다카라즈카 공연을 두 번째 오사카 공연으로 착각했고, 팜플렛과 일정표에도 그렇게 서술했기 때문이다. 오사카 제1회공연 팜플렛을 제작하면서 두 번의 리사이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최승희팜플렛 제2>에서도 다카라즈카 공연을 오사카 제2회공연이라고 서술했다.

 

 

최승희의 오사카공연 팜플렛에 쓰인 두 번의 리사이틀이 야기한 혼란은 다카라즈카에 대한 공연기획자들의 오해 때문임이 밝혀졌지만, 이것이 곧 다카시마 유사부로와 정병호(1994)와 이현준(2019)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사진이 여전히 도쿄 제2회공연의 팜플렛의 일부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최승희 무용활동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평전자이고, 정병호는 10년이상 최승희의 삶과 춤을 취재한 학자였다. 이현준도 그의 저서 <동양을 춤추는 최승희>의 서술방식과 그 내용으로 미루어, 자료조사를 허술하게 진행하는 연구자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진지한 저자들이 이 팜플렛을 도쿄 제2회공연 팜플렛으로 단정했다면, 거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근거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팜플렛 사진은 도쿄 공연과 오사카 공연의 팜플렛에 모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jc, 2025/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