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실수가 믾은 사람입니다. 인생을 전부 돌아봐도 실수한 게 많고, 지금도 순간순간 실수를 저지르고 있을 겁니다. 오죽하면 올해의 개인적 표어를 <다음 번엔 더 나은 실수(Let's Make Better Mistakes Next Time.)>로 정했겠어요? 이 나이를 먹고도...
공자님은 어느 나이를 지나고 나니까 하고싶은 대로 해도 실수가 없더라고 하셨다는데,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지난번 유준 화백의 <길>전 포스팅에서 <수퍼스타(2025)>를 잠깐 언급하면서, 십자가에서 피흘히는 에수님과 그 발 아래 웅크린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가듯이 한번 했는데, 거기가 실수였네요.
저는 얼른 보이는대로, 웅크린 주인공이 가난과 추위를 견뎌야 하는 이 사회의 약자 분들을 가리키나 보다, 하고 생각했고,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더니, 같은 사회, 같은 공통체의 일원이 저런 고생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건 사랑의 종교라는 별명을 무색케 하는게 아니냐, 는 메시지로 읽었던 것인데....
...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긴 하죠. 그러나 이 그림을 그렇게 읽으면, 제목이 왜 <수퍼스타>인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그 이야기는 빼고 넘어갔습니다. 그때 주제가 <수퍼스타>도 아니었으므로, 저 제목 문제는 나중에 유준 화백한테 물어봐야겠다, 고만 생각했죠.
어제 다시 <헤화아트센터>에 가서 입구 옆의 <수퍼스타>를 다시 찬찬히 보는데, 그앞을 지나가던 젊은 커플이 “저거 키세스지?“ 하는 겁니다. 키세스? 허쉬 키세스?
그래서 얼른 구글링을 했죠. 허쉬 초콜렛 키세스 이미지가 주욱 딸려 나오는 중간 중간에 남태령과 한남동의 전사들 모습도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외양이 진짜 허쉬 키세스를 닮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실수한 거죠.ㅠㅠ
저는 구독하는 신문도 없고, 집에 티비도 없습니다.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 다 끊고 처분한 지가 20년이 넘었거든요. 게다가 1월 초에는 고베 청구문고에서 발표할 논문 정리한다고 fb도 못하던 시기라서, 이 중요한 정보를 접하지 못한 겁니다. 티비와 신문을 끊은 이후 25년여만에 경험한 첫번째 불편인 셈인데...
그렇다면 <수퍼스타>의 의미는 완전 달라집니다. 기독교는 사랑뿐 아니라 정의를 표방한다는 종교 아닙니까? 에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에 대한 사랑과 신의 공의를 동시에 성취한 사건이라고, 기독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거니까요.
따라서 사랑없는 정의와 꼭 마찬가지로 정의없는 사랑은 둘 다 비기독교적일뿐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일입니다.
<수퍼스타>의 키세스는, 정의롭지도 않고 사랑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무도한 정권의 내란범들에게 정의를 실현하려는 젊은이들의 결단과 의지, 그리고 묵묵한 인내를 표상한다고 봐야겠지요.
그런 면에서 에수님과 키세스는 “수퍼스타”임에 틀림없습니다. 굳이 맹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상식적인 사고와 착한 마음을 실천하면 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공의를 실현하는 데에는 선각과 인내를 겸비한 수퍼스타가 필요한 게 사실이죠.
키세스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지는 아니겠지만, 기독교회가 게을리해 온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기꺼이 포기한 키세스들이 “수퍼스타”임에 틀림 없습니다. (jc, 20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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