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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도쿄1934공연] 1. 태풍 무로토

19349월 태풍 무로토가 일본에 상륙했다. 915일에 필리핀 동부 해상에서 발생한 무로토는 921일 오전5시경 시코쿠섬 고치현의 무로토 곶에 상륙했다.

 

 

태풍 무로토는 시코쿠 섬을 가로질러 이와지섬을 통과한 다음 921일 오전8시경 고베와 오사카 사이의 아마가사키에 재상륙, 그날 오후 교토를 관통하면서 큰 피해를 입혔다. 무로토 태풍으로 인한 사망자가 2702, 실종자가 334, 부상자가 약 15천명이었다.

 

 

한신지역의 피해는 극심했다. 4미터가 넘는 해일로 오사카만 연안이 모두 침수됐다. 지금도 JR아마가사키역의 남쪽 출구에 세워진 당시의 침수 높이를 표시한 기둥에 따르면 오사카 기준면(Osaka Peil)보다 5미터10센티미터가 높았다. 대피하지 못한 익사자가 1900명에 달했다.

 

 

무로토 태풍이 간사이 지역에 상륙할 당시의 풍속은 초속60미터의 강풍이었고, 이 때문에 약93천채의 가옥과 건물이 파손되고, 침몰하거나 파손된 선박이 약 28천척에 이르렀다.

 

 

이후 무로토는 923일 토야마(富山)만을 통해 동해상으로 나가 사도(佐渡)섬을 휩쓸었고, 23일 야마가타현의 쓰루오카(鶴岡)에 재상륙, 동북지역을 횡단한 후 24일 이와테현의 미야코(宮古)시를 지나 태평양으로 빠져나갔지만, 일본 역사상 최대 피해를 남긴 태풍의 하나로 꼽힌다.

 

 

오사카에서 직선거리로 4백킬로미터나 떨어진 도쿄에도 태풍의 영향이 미쳤다. 거센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라디오는 간사이풍수해(關西風水害) 상황을 속보로 전했고, 신문들도 호외를 발행해 피해 상황을 알렸다.

 

이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최승희는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공연 날짜를 정하고 극장을 섭외했을 때에는 태풍이 들이닥칠 것을 예상할 수 없었다. 난항은 그뿐이 아니었다.

 

 

가을 시즌이 시작된 일본 무용계에는 공연이 줄을 이었다. 미국무용가 라메리(La Meri)와 인도무용가 람 고팔(Ram Gopal)의 공연이 916일부터 22일까지 열렸고, 세계적 명성의 사하로프 부부가 923일부터 29일까지 히비야 공회당에서 공연했다. 이시이무용단에서 탈퇴해 독립했던 이시이 코나미도 922일 신작무용발표회를 열기로 되어 있었다.

 

이처럼 국내외 무용가들의 비중 있는 무용공연이 9월 말에 밀집되었기 때문에 22세의 젊은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는커녕 극장을 예약하기조차 어려웠다.

 

 

남편 안막의 동분서주로 간신히 일본청년관을 예약했으나 이는 대중교통이 미치기 못했다. 진궁외원(神宮外苑)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객들이 찾아오기 어려운 곳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정을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운명을 걸고 사회적 비평의 도마 위에 스스로 오르는 날, 920일이 드디어 다가왔습니다. 아침에 나는 이상한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소리는 엄청난 폭풍우 소리였습니다.

 

이 며칠을 선전(宣傳), 표 판매에, 의상 제작에, 작품 창작에, 밤새도록 자지 않고 고심하면서 진행해 온 발표회, 이 날이야말로 화창한 날씨를 기대했던 날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람은 점점 더 세차게 불었고, 비를 동반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디오는 오사카의 풍수해의 참상을 끊임없이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도쿄도 그 여파로 이렇게 날씨가 거칠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도 나도 그저 얼굴을 마주 본 채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장소도 비가 오는 날이면 특히 불편한 신궁외원의 일본청년관입니다. 이 폭풍을 무릅쓰고 누가 내 무용을 보러 와줄까? 시나노마치(信濃町)에서 성선(省線)을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만 우산을 제대로 붙잡을 수도 없을 정도의 심한 비바람입니다. 우리는 아기를 기름종이로 싸고 바람과 비를 맞으며 회장에 도착했습니다.”

 

 

이처럼 최승희 제1회 도쿄공연은 최악의 상황에서 진행됐다. 공연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본과 해외의 유수 무용가들과 경쟁해야 했었는데, 게다가 태풍 무로토의 방해까지 무릅써야 했던 것이다. (jc, 2024/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