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인 추도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3. 기리히타의 철도공사 <순직자비>

[이글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25에 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또 하나의 이례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다. 후쿠치야마선 공사에서 순직한 다른 노동자들의 추도비가 세워진 위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이다.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 순직자비는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 있습니다.”

 

후쿠치야마선 철도는 1891 7월 아마가사키-나가스 사이의 가와나베 철도로 시작되었다. 이 철도는 같은 해 9월에 이타미, 1897년 다카라즈카, 1898년에는 나마제까지 연장되었고, 1912년에는 아마가사키에서 후쿠치야마까지의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다카라즈카의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에서 순직한 일본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키리하타에 세워진 <순직자의비> 1891년부터 1912년까지의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에서 희생된 순직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이다.  <순직자의 비> 1979년 니시타니 청년회의 주도로 세워졌는데, 여기에 새겨진 20명의 순직자 명단에는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가 1987년 정홍영 선생과 곤도 선생은 후쿠치야마선 제1차 개수공사(1929)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2명의 이름을 확인했고, 그들이 순직한 지점이 무코강 6호터널 앞이라는 점도 밝혀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김예곤 선생과 곤도 선생 등은 2020 3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면서 그 비문에서 니시타니의 <순직자비>를 언급한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니시타니의 <순직자비>를 언급한 까닭은 추도비 설립 목적을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다카라즈카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라면 서로 연계되어 추도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추도되고 기억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기리하타의 다치아이신덴에 세워진 <순직자의비> 위치를 명시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같은 철도의 건설하고 보수하기 위해 순직한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의 연대하여 추도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문구이다.

 

일본인 노동자를 기리는 <순직자의비>와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세워지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본인과 조선인이 구별이나 차별로 비쳐지면 안 된다는 것은 추도비 설립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자들은 그 비문에 <순직자의 비>를 언급함으로써 연대감을 표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느 사회에서나 현지인과 외래인의 구별과 대립과 갈등은 사회문제가 되어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출신지와 상관없이 지역사회에 공헌한 점이 공정하게 인정되고 기억되는 것이 또한 정상적인 흐름이다.

 

미국의 보스톤과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 공사(1863-1869)에서도 중국인 노동자들의 희생은 지대했었다. 공사가 끝난 후 센트럴퍼시픽 철도회사의 스탠포드 사장은 중국인들의 희생을 애도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차이나타운을 기부했다. 또 자신이 설립한 스탠포드 대학에 일정한 수의 중국인이 입학하도록 할당을 두기도 했다. 지금도 대륙횡단철도를 따라 중국인 노동자들의 추도비가 곳곳에 세워져 그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부설공사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저서와 기념비.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대대적인 철도공사 과정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난과 희생을 기록하고 이를 추도하는 모습은 철도 연변의 주요 도시들에서 자주 발견된다.

 

비슷한 일이 다카라즈카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비록 철도공사 당시에는 가난하고 힘없고 언어까지 서툴었을 조선인들이 고통스럽게 일해야 했을 것이고, 현지인들이 그들을 차별하거나 멸시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다카라즈카의 시민들과 지도자들은 지역사회 근대화를 위해 조선인들이 치른 희생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나마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와 개수공사(1929)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순직자의비(1979)>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를 건립한 것도 그 때문이다. 후자의 비문에 전자의 위치를 명시한 것은 국적을 초월한 연대감을 나타낸 것이다.

 

강물은 굽이쳐 흐르지만 결국 바다로 흘러든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온갖 상충과 갈등을 겪더라도 결국 인류애의 바다로 귀결된다. 그것은 <순직자의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연결하는 한 줄의 문장이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jc, 2021/4/29)

 

[이글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25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