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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추도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6. 제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이글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17에 있습니다.]

 

결국 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존경하는 곤도 도미오 선생과 형님처럼 친근한 정세화 선생의 권유가 계기였다. 하지만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1백년의 역사 속에 묻히신 분들의 흔적을 어떻게 찾아낼 지 요량이 서지 않았다.

 

문득,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하신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최승희 선생의 공연 기록을 찾아내는 것을 보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셨던 것일까? 2018년 여름부터 나는 40개 이상의 일본 도시를 방문하면서 최승희 선생의 공연 기록을 발굴했다. 대개 단신이거나 홍보기사에 불과한 것도 많았지만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기록들도 꽤 발견되었다.

 

작년(2020년) 3월 고베 취재할때, 정세화 선생(오른쪽)과 함께 신도 도시유키선생(가운데)을 만나뵙고 점심을 함께 하며 인사를 드린 바 있었다. 신도 선생은 아시는 것도 많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신데다가 인터넷 검색과 일본어 고문 해독에서 능하셔서 내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

 

나는 그런 자료를 어렵사리 발굴해 놓고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형편없는 일본어 실력 때문이기도 했고, 80년 전의 일본어가 지금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애를 먹인 것은 불분명한 활자였다.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복사해온 자료들 중에는 읽을 수 없을 만큼 글자들이 흐릿하거나 뭉개져 있는 것이 많았다.

 

그런 자료가 나타날 때마다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께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신도 선생은 정세화 선생의 절친이자 동료이고, 2020 3월 내가 고베를 방문했을 때 기카와니시(木川西)의 라멘 전문점 라이라이테이(来来亭)에서 점심을 하며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쾌활하신 성품에 재밌는 농담도 잘하시는데, 놀랍게도 인터넷 검색도 잘하신다. 내가 무언가 궁금한 것을 질문 드리면 순식간에 답을 찾아 링크와 함께 보내주신다.

 

신도 선생은 일본어 고문(古文) 읽기에도 능하셨다. (1920-30년대의 일본어가 고문으로 분류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어가 오늘날과 다른 것도 많고, 심지어 오늘날 볼 수 없는 철자들이 사용되기도 한다.) 신도 선생은 흐리거나 뭉개진 글자도 앞뒤의 맥락과 단어들 사이의 관련성을 참고해서 금방 판독해 주시곤 하셨다.

 

신도 선생께 부탁하는 일이 잦아지니까 죄송한 마음에 곤도 도미오 선생께도 부탁을 드리기 시작했고, 결국 두 분과 정세화 선생과 내가 참가하는 단체LINE방이 생긴 것을 계기로 두 분이 번갈아가며 내 질문에 대답해 주시곤 했다.

 

일본 각 도시에서 수집한 최승희 선생 공연관련 자료는 때로 읽기 어려운 글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도 선생과 곤도 선생은 앞뒤 맥락과 1920-30년대의 상황을 참고하여, 내가 도저히 읽어내지 못한 글자와 뜻을 모르는 단어들을 해독해 주시곤 했다.

 

언어도 서툴고 일본의 역사와 지리 개념도 부족한 내가 80년 전의 최승희 선생 일본 공연 자료를 찾아 해독해 나가는 모습이 엉뚱하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런 핸디캡을 메우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그냥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마치 내가 자료조사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 잘못된 인상을 주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과정 중에 나는 자연스럽게 곤도 선생과 정세화 선생을 통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들의 신원과 연고를 찾아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2020 9월 말경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난감했다. <강제동원>은 중요한 연구 주제지만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분야였다. 게다가 추도비의 주인공들은 강제동원이 시작되기 전에 노동이민으로 일본에 오신 분들이고, 당시에는 관공서 기록이나 회사 기록도 매우 부실했던 시기였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다섯 이름은 윤길문, 오이근,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였다. 나는 이들의 연고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공사 중의 사고가 지역 신문에 보도되더라도 일회성 기사에 그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언론의 주목을 받던 인기예술가 최승희 선생과는 달리 매체나 기록보관소에서 문헌 자료를 찾기가 어려운 분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곤도 선생과 신도 선생, 정세화 선생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분들은 수십 년 동안 희생자분들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제사해온 분들이었다. 그런 고마운 분들의 소원은 내게 중요하다.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노력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세화 선생에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jc, 2021/4/19)

 

[이글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17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