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10에 있습니다.]
정홍영 선생은 1987년 11월, 고베시 니시노미아(西宮) 고요엔(甲陽園)의 地下壕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쓴 벽서를 발견했다. 이 깊숙한 지하 땅굴 속 암벽에서 ‘조선국 독립’과 ‘초록의 봄(綠の春)’이라고 쓴 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일본 전역에 산재한 지하호에서 그것을 건설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벽서가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마츠시로의 대본영 지하 땅굴 속에서 ‘밀양’과 ‘대구’, ‘세배’와 ‘구운몽’이라는 조선인 노동자의 벽서가 발견된 것도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후였다.
마츠시로 지하호의 벽서는 그 뜻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할 것같다. ‘밀양’과 ‘대구’ 등은 그곳 출신자들이 고향을 그리며 쓴 문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배’와 ‘구운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중 ‘1945년 새해를 맞아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지 못하는 슬픔’을 표시한 것이라는 설명과 ‘김만중이 자기 어머니를 위해 썼다는 구운몽을 빗대어, 조선인 노동자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도 나와 있다.
하지만 다른 설명도 있었다. 자세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인 소설가이자 동화작가인 와다 노부로(和田登)씨는 이 벽서의 사진을 설명하면서 “너희들도 군대의 파괴도 모두 끝이다(おまえらも軍隊の壊もみんなおわりだ)”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 벽서가 과연 그렇게까지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니시노미야 고요엔 지하호에서 발견된 조선인 노동자의 벽서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조선국 독립(朝鮮國獨立)”이란 일제의 패전과 함께 갑자기 다가온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는 뜻임에 틀림없다. “푸른 봄(綠の春)”이라는 글도 해방과 함께 찾아온 새로운 희망을 비유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벽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기 아직 이르다. 조선인들한테는 ‘조선국’보다는 ‘조선’이라는 표현에 익숙하고, 또 ‘녹의춘(綠の春)’ 보다는 ‘녹춘(綠春)’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 ‘국(國’이나 ‘노(の)’를 삽입한 것은 일본어 표현에 가깝다. 따라서 이 벽서는 일본인이나 일본어에 능숙한 조선인이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역사적인 발견의 현장에는 정홍영 선생과 함께 놀라움과 기쁨을 나눈 3명의 동료가 있었다. 그의 동생 정지영(鄭志永)씨, 그의 아들 정세화씨의 친구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씨,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조선인 청년이었다. 정홍영 선생과 정지영 선생은 타계하셨고 조선인 청년은 행방을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신도 도시유키 선생의 증언을 나는 뒤늦게나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날, 우리 네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지하호 현장으로 갔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은 종전 후에 공개된 ‘미군 전략폭격 조사보고서’를 조사하던 중, 니시노미야가 폭격의 대상이 된 것은 거기에 있던 가와니시 항공기회사의 지하 공장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그 지하공장의 위치를 파악하신 후에 가까운 분들과 탐색대를 꾸리신 것이지요.
“처음에는 정홍영 선생의 아들이자 내 친구인 정세화씨도 같이 가기로 했으나 뭔가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고, 조선인 청년 한명이 짐을 운반해 줄 아르바이트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날 카메라와 전등, 간이 발전기 등을 비롯해서 운반할 짐이 꽤 많았거든요.
“지하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래 길이 나왔어요. 한쪽은 천장과 벽이 시멘트로 발라진 다듬어진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울퉁불퉁한 암벽이 드러난 거친 길이었지요. 우리는 두 패로 나뉘어 탐색에 나섰는데, 나는 정홍영 선생과 함께 거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칠흑 같이 깜깜한 굴속에서 손전등으로 벽을 훑어보았을 때 나는 무언가 글씨 같은 것을 본 것 같았어요. 즉시 정홍영 선생님께 알리자 자세히 살펴보시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급히 다른 두 사람을 불러서 이 ‘대단한 발견’을 알렸고, 다들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우리는 내가 가져간 카메라의 플래시와 타이머를 이용해서 그 글씨를 배경으로 4명의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발견은 정홍영 선생의 발견으로 발표되었다. <효고조선관계연구회>의 노부나가 마사요시(信長正義) 선생은 <무쿠게통신(1989년 7월30일, 115호)>에 게재한 인터뷰 기사에서 “니시노미야시 고요엔 터널 안에서 ‘조선국 독립’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정홍영씨”라는 표현을 썼다.
<무쿠게통신(2000년 1월30일, 178호)>에 실린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의 글에도 정홍영 선생은 “무엇보다도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자가 남아있는 니시노미야시 코요엔의 지하벙커의 발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밝혀져 있다.
또 <효고 안의 조선(兵庫のなかの朝鮮, 2001)>에 실린 서원수(徐元洙) 선생의 글에도 “‘조선국 독립’, ‘녹색의 봄’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는 고요엔 비밀 지하벙커는 지금은 작고한 고 정홍영 씨 등이 1987년 11월에 발견”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한국의 <세계한민족백과사전>에도 “고요엔 지하호 유적은 효고조선관계연구회 회원인 정홍영(鄭鴻永)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렸다. ... 특히 1987년 11월에 정홍영이 발견한 4호 터널에는 ‘조선국 독립’, ‘초록의 봄’이라는 낙서가 남겨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백과사전이 고요엔 지하호 암벽의 문구를 ‘낙서(落書)’라고 표현한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선인이 조국의 독립을 축하하고, 새로운 희망을 표현한 글을 ‘낙서’라고 폄하할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낙서’라는 말보다는 ‘벽서(壁書)’라는 표현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지하호의 벽서는 정홍영 선생이 단독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4명의 일행이 있었고, 특히 신도 도시유키씨의 직접적인 도움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도 선생이 글자를 발견했고 탐색대장이셨던 정홍영 선생께서 즉석에서 그것을 해독하고 그 중요성을 알아보셨기 때문이다. 서원수 선생도 이 벽서의 발견자로 ‘정홍영씨 등’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탐색대에 참가하지 못했던 정세화씨도 그 벽서 발견의 날을 회상하면서 “지하호에서 돌아온 신도 도시유키씨가 나를 보자마자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뒤에도 신도씨는 그 벽서의 발견과정을 몇 번이고 세세하게 설명하곤 했기 때문에 나도 익히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1945년 초에 착공된 고요엔 지하호는 겉으로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한 일반시민의 방공호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가와니시(川西) 항공기제작사의 전투기 시덴카이(紫電改)의 부품을 제작하는 비밀 지하공장이었다.
땅굴은 1호부터 7호까지 7개를 파기로 계획되었으며, 강제 동원된 조선인 젊은이 5-6백명이 최악의 노동조건 속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가 강행됐다. 그러나 카와니시사가 이 비밀공장에서 비행기 부품 생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했다.
‘조선국 독립’과 ‘푸른 봄’이라는 벽서는 아마도 일본제국 패망의 날, 즉, 1945년 8월15일, 일본 천황의 항복문 낭독이 방송된 직후에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희망에 찬 조선인들이 지하호를 떠날 채비를 갖추면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정홍영 선생은 곤도 도미오, 신도 도시유키 선생 등과 협력하면서 니시노미아의 고요엔에서 나가노의 마츠시로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난이 있었던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연구주제로 삼았고, 조사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이들이 연구의 심혈을 기울인 곳은 역시 그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효고현 다카라즈카였다. 그것은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과 곤도 도미오 선생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가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jc, 202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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