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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추도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5. 무연고 희생자들

[이글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16에 있습니다.]

 

정세화 선생한테서 말씀만 전해 들어오던 곤도 도미오 선생과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은 2020 9월이었다. 라인(LINE)을 통해서 첫인사를 드렸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곤도 선생을 직접 만나뵌 적이 없다. 코로나19 방역이 엄격해진데다 갑자기 발생한 한일 교역마찰의 여파로 한국인의 일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곤도 선생이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해 오신 것도 존경할 만한 일이지만, 내게는 그가 신의를 갖춘 인물로 특별히 각인되었다. 그가 스승처럼 따르던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잊지 않으시고 뜻밖의 연락을 주신 만후쿠지 주지스님의 당부도 받아들여 오랜 준비 끝에 5인의 순직자를 위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신 것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는 많은 일본인 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의 뜻을 잊지 않은 곤도 도미오 선생의 오랜 노력 끝에 세워졌다.

곤도 선생에게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우리가 재일 조선학교에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을 벌일 때 가장 먼저 찬성하고 참여해 주신 일본인이셨기 때문이다. 정세화 선생의 친절한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곤도 선생은 아마도 이 일이 당신이 오래 활동해 온 <다카라즈카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의 취지와도 부합된다고 이해해 주셨던 것 같다.

 

한국에서 <2차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을 마치고 모아진 후원금으로 무용신이 준비되었을 때, 곤도 선생은 2020 116일 직접 오사카에 가서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손수 무용신을 전달해 주셨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씀도 해 주셨는데, 그 격려사 원고를 내게도 보내 주셨다. 서두의 위트 있는 말씀도 재미있었고, 그날 관람하신 무용작품들에 대한 감상평도 좋았지만, 내게 감명 깊었던 것은 아래와 같은 말씀이었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분들(=한국의 후원자들)에게 마음이 움직여서 한국과 미국 사람들에게도 호소하면서 힘을 모아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2020년 11월6일, 곤도 도미오 선생은 오사카에서 열린 깅키지역 조선학생 무용경연대회장을 방문해 준비된 무용신을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마음이 움직였다는 표현이 가슴에 박혔다. 재일 동포 학생들을 후원하는 일이야 한국 동포로서 마땅히 할 일이지만, 거기에 마음이 움직이셨다고 한다. 사실 나도 그랬다. 일본인 교육자로서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들이 겪어온 편견과 차별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온 곤도 도미오 선생의 인품과 활동에 나 역시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해 11월 중순에 일본에서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시민단체를 결성한 것도 정세화 선생과 함께 곤도 도미오 선생이 앞장 서 주신 덕분이다. 한국에서 이인형 선생과 내가 <무용신> 후원회원을 모집해가는 동안 일본에서는 <팀아이>가 결성된 것이다. <무용신> <팀아이>는 연락을 계속하면서 뜻을 모았고 필요한 사업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팀아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보는(eye)' 이라는 뜻으로, 곤도 선생이 직접 지으신 이름이다. <팀아이> 회원들은 젊은이들이 각자 살아가는 터전에서 편견과 차별 없이,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재일 조선학교 후원도 그런 대의에 부합되는 일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의 또 한가지 소원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5인의 순직자들의 한국내 연고를 찾는 일이다.

 

곤도 선생에게는 또 한 가지 소원이 있으셨다. 그것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조선인 희생자 다섯 사람의 연고를 찾는 것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곤도 선생이 그분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적도 있다는 말씀도 전해 주셨다.

 

곤도 선생의 <무쿠게통신(300)> 기고문을 읽어보면 그가 조선인 순직자들의 연고를 찾으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정홍영 선생의 뜻이기도 했고, 또 타마세의 만후쿠지의 주지스님과 부녀회원들의 소원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홍영 선생이 아직 살아계시고 연구를 계속하셨다면 분명히 그 순직자들의 연고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1백년 이상 무연고자 제사를 드려온 스님들과 부녀회원들의 바람도 마찬가지였다.

 

곤도 도미오 선생은 그분들의 소원을 실현해 드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jc, 2021/4/19)

 

[이글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16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