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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2023취재

[도호쿠2023취재] 19. 아오모리 (5) 히로사키 공연

19361123일에는 최승희 무용단의 히로사키(弘前) 공연이 있었습니다. 전날의 아오모리 공연에 이어 제자 히라사와 키요코(平澤喜代子)를 데뷔시키는 두 번째 공연이었지요.

 

아오모리는 키요코의 고향이고, 히로사키는 키요코가 여학교를 다니던 곳입니다. 히라사와 키요코의 연고가 있던 두 도시에서 데뷔 공연을 열어준 것이니, 당시 최승희가 제자 히라사와 키요코를 얼마나 배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서둘러서 히라사와 키요코를 데뷔시켰는지 궁금합니다. 제자로 훈련시키기 시작한 지 반년 만에 고향 무대에 서게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겁니다. 자신도 1년 반이 걸렸던 마당에, 아무리 뛰어난 제자라고 해도 반 년 만에 무용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최승희의 고향 데뷔는 1년 반만에 이뤄졌지만, 일본에서 무대에 데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빠르기는 합니다. 1926619일의 <경성일보>는 최승희가 1926622일 도쿄의 호가쿠자(邦樂座)에서 열릴 예정인 이시이 바쿠의 <무용시 공연회>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출연하게 된다고 예고 기사를 냈습니다.

 

같은 날짜의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출연하는 작품이 독무 <물고기춤()>과 중무 <방황하는 혼의 무리()>, <습작(習作)>, <그로테스크(グロテスク)>, <까막잡기(ごっこ)>, <젊은 판과 님프>, 모두 5작품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문헌을 통해 최승희가 이보다 열흘 빠른 1926612일 오사카 무대에 출연한 적이 있으며, 이것이 최승희의 일본 데뷔무대였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1926613일의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은 니시요도가와(西淀川)구 우라에쵸(浦江町)의 금란회(金蘭會) 고등여학교 동창회인 요시토모카이(芳友會)가 모교 후원을 위해 12일 오후1시부터 나카노시마(中之島) 공회당에서 대공연을 열었으며, 이 공연에 이시이 바쿠 무용단이 초대되어 <산을 오르다()>등의 다수 작품을 발표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에는 사진이 한 장 게재되었는데, 이 사진 속에 이시이 바쿠, 이시이 코나미, 이시이 에이코, 이시이 요시코 등과 함께 최승희의 모습이 보입니다.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작품 <그로테스크> 공연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 이 공연회에서 최승희는 같은 의상을 입고 있는 이시이 에이코, 이시이 요시코와 함께 <그레테스크>를 공연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최승희는 도쿄 호가쿠자에서 <물고기춤>을 공연하기 열흘 전에 오사카의 나카노시마 공회당에서 <그로테스크>에 출연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로테스크>3명의 무용수가 출연하는 중무였고, <물고기춤>은 최승희 단독의 독무였으므로, 독무의 초공연은 도쿄 호가쿠자 공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승희의 일본 초무대는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였던 점은 문헌으로 분명히 뒷받침 되는 것이지요.

 

이때가 최승희가 무용 수업을 시작한지 만 석 달도 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최승희의 데뷔도 매우 빨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향 데뷔를 기준으로 한다면 히라사와 키요코의 아오모리 데뷔 공연이 최승희의 경성 공연보다 무려 1년 이상 빨랐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승희는 어째서 제자 히라사와 키요코의 고향 데뷔를 서둘렀던 것일까요? 거기에는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물론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들은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의 특별한 정황이 있었다면, 최승희가 1937년 여름에 세계 순회공연을 떠날 예정이었다는 점입니다.

 

세계 순회공연의 시작은 1937년 여름에서 겨울로 반년이 미뤄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1936년 말의 계획으로는 곧 세계 순회공연을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지만 순회공연에 동행시킬 수는 없었던 히라사와 키요코는 서둘러 고향에서 데뷔공연을 열어주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게 됩니다. (jc, 202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