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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친구들

[센다 코레야] 2. 예술가 집안

센다 코레아는 명문 예술가 집안 출신이다. <일본대백과전서 니포니카>는 무용가 이토 미치오(伊藤道郎, 1893-1961)와 무대 미술가 이토 키사쿠(伊藤熹朔, 1899-1967)가 그의 형이라고 소개했지만, 그의 부친 이토 타메키치(伊藤為吉, 1864-1943)도 건축가와 발명가였고, 그의 다른 형제들도 화가, 오페라 가수, 작곡가 등의 예술가로 활동했다. 대단한 집안이다.

 

부친 이토 타메키치는 미에(三重)현 마츠사카(松阪) 출신으로 17세에 도쿄에 상경, 고부(工部)대학교(=도쿄 공과대학의 전신)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22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인근 수도회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학비 마련을 위해 세탁소에서 일하는 한편, 이탈리아인 건축가 카펠레티(Giovanni Vincenzo Cappelletti, 1843-1887)의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제도공으로 일하면서 건축학과 물리학을 배웠다.

 

1887년 일본에 돌아온 이토 타메키치는 도쿄에서 일본 최초의 세탁소 <이토구미 세염소(伊藤組洗染所, 1887)>를 개점했는가 하면, 1889년에는 이토 건축사무소를 설립하여 서양식 건축의 설계와 시공업무를 시작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로는 도리이자카 교회(鳥居坂教会, 1889)와 시즈오카교회(静岡教会, 1892), <니시카타교회(西片町教会, 1888)> 등의 교회건물 뿐 아니라, 도쿄 미나토구의 <아타고(愛宕)호텔(1889)><아타코탑(1889)>, 도쿄 긴자의 <핫토리(服部)시계점(1892)><하쿠힌칸(博品館(1899)> 등의 상업시설도 다수 있었다.

 

이토 타메키치는 지진이 많은 일본에 적합한 내진 건축을 연구하면서 다수의 건축용구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담배 권련포장기를 발명하는 등 평생 70여개의 특허를 출원, 일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쿠릴 열도 탐험대에게 3시간 만에 완성할 수 있는 조립식 가옥을 제공했고, 그가 발명한 이토식 콘크리트로 만든 담장은 내진력이 탁월해 1923년의 간토대지진 때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1933년에는 오사카로 이주해 이토연구소를 설립하고 무한동력기관의 발명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토 타메키치는 9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차남인 이토 미치오는 무용가, 3남 이토 카나에(伊藤鉄衛, 1895-?)는 건축가, 4남인 이토 유지(伊藤祐司, 1896-?)는 오페라 가수, 5남인 이토 키사쿠가 무대미술가, 차녀인 이토 노부코(伊藤暢子, 1902-?)는 화가,

 

 

6남인 이토 쿠니오(=센다 코레야)가 배우/연출가, 3녀인 이토 아이코(あいこ, 1905-?)는 일본국악 음악가, 8남인 이토 텐료(伊藤貞亮, 1908-?)는 건축가, 9남인 이토 오스케(伊藤翁介, 1911-2009)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로, 요절한 장남과 7남을 제외하고, 자녀들이 모두 예술의 길을 걸었다.

 

배우와 연출가로 활약했던 센다 코레야의 경력도 화려하다. 그는 평생 74편의 극영화에 출연했고, 1970년과 1988년에 촬영한 기록영화까지 합치면 모두 76편의 영화에 출연한 바 있다.

 

 

그의 활약은 연극부문에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1952년 문화청이 표창하는 예능선장(芸能選奨)에 선출된 이래, 1957년 도쿄의 연극부기자들이 선정하는 테아토론(テアトロン)상 수상, 1958년 마이니치연극상(연출부문)1977년 아사히상(朝日賞)을 받았고, 1979년에는 예능공로자(芸能功労者)로 선정되었다.

 

센다 코레야는 일본 연극계의 선구적 지도자였다. 1933<학예자유동맹>의 창립위원을 필두로, 50년 동안 극단 <하이유우자(俳優座)>의 대표(1944-1994)를 역임했고, <하이유우자> 전용극장이 건립되자 그 대표이사(1967-1993)로 취임했다. 그밖에 <일본연출가협회> 이사장, <일본연극협회>의 상무이사, <일본극단협의회>의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센다 코레야는 연기자이자 연출자,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다한 후에도 <센다 코레야 연극 대화집(千田是也演劇対話集, 1978, 2)>, <센다 코레야 연극논집(千田是也演劇論集, 1980-1992, 9)>, 유고집 <극백 센다 코레야(劇白千田是也, 1995)> 등을 집필해, 반세기에 걸친 일본 연극/영화계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제공했다.

 

이 전 기간을 통해 그는 센다가야의 조선인이라는 뜻의 센다 코레야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그 필명을 쓰게 된 사연을 밝혔다. (jc, 2023/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