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벌교-소록도-득량만으로 긴 동선을 소화했지만, 분주하거나 빡빡한 느낌은 없었다. 벌교 방문은 유익했고, 소록도는 자극적이었고, 득량만 장군쟁이 해변은 느긋했기 때문이다.
회소헌에 도착한 후, 내가 거북정의 저녁 정원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있는 동안 몇 사람은 쉴 틈도 없이 저녁식사 준비에 돌입했다. 차일을 치고, 밥과 반찬, 채소를 준비하면서 워낙 소리소문 없이 일해 주신 바람에,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까 식사준비를 해 주신 분들이 누구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뒤늦게나마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저녁식사의 주 메뉴는 김용대-김수산나 선생 부부가 논산에서 공수한 삼겹살이었다. 태안 엠티 때에 맛보고 감탄했던 삼겹살이었기에, 이 고기는 이름을 따로 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제안했더니, 김용대 회장님이 웃으며 “고기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논산제 삼겹살은 “고기돼지”라고 부르기로 되었다.
서로 고기를 굽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나는 맛있게 먹는 것을 빼고는 할 일이 없었다. 우리 테이블에서는 이원영이 선생이 집게를 잡았다. 돼지고기는 바짝 구워야한다는 속설은 잘못이라며 이원영 선생은, 고기돼지의 육즙이 주는 풍미를 해치지 않을 만큼 구워서 먹기 좋게 잘라주었는데, 자른 고기가 너무 작다는 점만 빼고는 완벽한 조리였다.
배도 부르고 알콜도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할 무렵, 박한용 선생이 느닷없이 한시를 발표했다. <회소헌(懷笑軒)>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 칠언절구는 이렇다.
分斷山河隔南北 (분단산하격남북) 산하는 남북으로 쪼개지니
瑞鳳靈龜恨千年 (서봉영구한천년) 상서로운 봉황과 신령한 거북은 천년의 한을 품었구나
民主統一今何在 (민주통일금하재) 민주통일의 그날은 어느 곳에서 찾으랴
正是今夜懷笑軒 (정시금야회소헌) 오늘밤 이자리 회소헌이 그곳일세.
상서로운 봉황과 신령한 거북이란 “봉강(鳳崗)리의 거북정”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봉황과 거북이 천년의 한을 품었다는 것은 봉강 정해룡 선생 이후 이 집안이 겪어야 했던 지난한 고통(승)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남북이 분단되었기 때문(기)이다.
그러나 그 한을 풀어나갈 민주와 통일(전)의 출발점이 바로 오늘밤 이곳, 회소헌(결)임을 천명한 시이다. 목표를 ‘남북통일’뿐 아니라 ‘민주’적인 ‘통일’로 명시한 것이 인상적이다. 정치가들의 권모술수나 이합집산이 아니라, 민중이 주인되는 통일을 지향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사뭇 비감한 기승구와 앞날을 낙관하는 전결구가 대조적인데, 거북정의 비감과 회소헌의 낙관 사이에서 30여명의 은하수 회원들이 박한용 선생이 읊는 그 한시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별로 취하지도 않은 술이 다 깨는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박한용 선생은 평측도 압운도 맞지 않지만 그냥 뜻으로 이해해 달라고 하셨지만, 다행히 나는 평측과 압운이 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한시 자체를 잘 모르는데, 운문으로 즐기기는커녕 한국어로 번역해 주지 않으면 뜻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박한용 선생은 칠언절구 <懷笑軒>을 한국어로 번역도 해 주셨고, 나는 다소 말짱해진 정신으로 고기돼지 먹던 젓가락을 놓고 휴대폰 문자판을 열어서 영시로 번역했다. 4행 영시(trochaic tetrameter)라고는 하지만 강약(feet)과 라임(rhyme)을 완전히 무시한, 뜻 중심의 번역이었다.
For the South and North, divided Koreas,
Phenix and Turtle have lamented for thousand years.
Democratic Reunification, where can it be found?
It starts tonight right here in Hoesohun!
칠언절구이든 4행 영시이든 한국인들에게는 운문의 역할을 하기에 부족할 수 밖에 없다. 나중에라도 누군가 <懷笑軒>과 <Hoesohun>의 뜻을 살려 ‘웃음이 머무는 집’ <회소헌>을 한국어 시로 제대로 읊어주기를 기다린다. (jc, 2025/5/31)
'은하수2025보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하수2025보성] 17. 답사기를 마치면서 (2) | 2025.06.11 |
---|---|
[은하수2025보성] 16. 삼의당과 대한다원 (4) | 2025.06.03 |
[은하수2025보성] 14. 득량만의 장군쟁이 (2) | 2025.05.31 |
[은하수2025보성] 13. 당신들의 천국 (0) | 2025.05.26 |
[은하수2025보성] 12. 소록도와 한센병 (1) | 2025.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