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931벌교공연] 13. 최승일과 안막

1930년 12월6일의 <벌교극장> 낙성식에서는 당대 조선 최고 인기의 여류명창 이화중선 남매의 판소리 공연이 열렸다. 최승희의 <벌교극장> 공연은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인 1931년 12월6일이었다. 최승희의 공연은 <벌교극장> 개관 1주년 기념공연이었다는 뜻이다.

 

이화중선(李花中仙, 1898-1943)이 벌교의 행사에 초청된 것은, 첫째, 그녀가 조선 최고의 명창이었고, 둘째, 벌교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포에서 태어난 이화중선은 5세 때에 벌교로 이주했고, 부산을 거쳐 13세에 남원으로 이주할 때까지 벌교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5세(1913년)에 남원에서 출가한 이화중선은 17세(1915년)에 순창으로 이주했고 1921년 경성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6년 동안 순창에서 살았다. 경성활동 중에 명창의 반열에 오른 이화중선은 30세(1928년)에 남편 장득진이 사망하자 전북 임실군 오수로 이주해 그곳에서 1931년 재혼했고, 이듬해(1932년) 경성활동을 재개했다.

 

다시 말해 이화중선은 경성활동 시기를 제외하면 항상 전남(목포, 벌교, 순창)과 전북(남원, 임실)에서 활동했고, 그중 벌교 거주기간이 8년으로 추정된다. 경성에서 유명해지기 전에 이미 호남에서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음에 틀림없다.

 

최승희는 어떤 경로로 벌교에 초청되었을까? <벌교극장> 개관 1주년 기념공연을 기획하면서 채중현은 이번에도 두 기준을 사용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 최고의 예술가로 최승희를 선택한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최승희가 벌교와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최승희와 안막이 벌교에 살았던 적은 없으니 주변 인물의 인맥을 살폈다. 채동선(1901-1953)의 약력을 정리하다 보면 평행처럼 떠오른 인물이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1902-?)이다.

 

채동선과 최승일은 동년배이다. 최승일은 채동선과 같은 1901년생으로 알려져 왔지만, 종로구청의 호적에는 1902년생이었다. 당시에는 호적상의 생년과 실제의 생년에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최승일의 실제 생년이 1901년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강원도 홍천 출생인 최승일은 1905년경 대지주인 아버지 최준현(崔濬鉉)를 따라 상경, 배재학당에서 수학했다. 채동선처럼 최승일도 삼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졸업 전에 배재학당을 퇴학했다. 1920년 도쿄의 니혼대(日本大) 미학과에 입학했지만, 1922년 집안이 경제적으로 몰락하자 2년 만에 중퇴하고 경성으로 돌아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문사로 활동했다.

 

 

즉, 채동선과 최승일은 지방 출신으로 같은 시기에 경성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했고, 같은 시기에 도쿄에서 유학했다. 1920년대 초의 조선인 도쿄 유학생은 1년 졸업생이 1백명 미만이던 시절이므로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채동선과 최승일이 적어도 지인 사이였을 것이므로 채동선이 부친 채중현의 부탁으로 최승희 초청공연의 의사를 최승희의 매니저 역할을 하던 최승일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최승희의 남편 안막(1910-?)은 채동선과 학연이 있다. 채동선보다 9살 연하이므로 학창시절이 겹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와세다대학 영문학과 동창이다. 1930년 1월15일 재경성 와세다대 동창회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채동선의 독주회를 주최했고, 연주회가 끝난 뒤 동창회 회식을 열었다. 당시 경성에 체재했던 안막도 연주회와 회식에 참석했을 것이고, 이는 아직 재학생인 안막이 졸업생 선배 채동선을 직접 만난 첫 자리였을 것이다.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1931년 5월9일로 최승희의 벌교 공연 반년 전이다. 따라서 <벌교극장> 개관1주년 기념행사로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유치하려는 것이 채중현의 계획이었다면, 이는 채동선과 안막의 협의를 통해 성사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직접 뒷받침할 문헌 자료는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최승희가 1931년의 호남 순회공연 일정을 짜면서 전주, 목포, 광주를 거쳐 마지막으로 벌교 공연을 가지게 된 것은 채동선과 최승일, 혹은 채동선과 안막의 교섭으로 이뤄졌을 개연성이 크다. (jc, 2022/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