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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추도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7-4. 정홍영 선생의 추가 탐문 조사

[이 취재기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33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 사고를 보도한 1929 328일자 4개 신문의 기사를 꼼꼼히 살피면서 사고 당시의 상황과 피해자들의 인적사항과 한국 내 연고지를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정홍영 선생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80년대까지 생존해 계신 지역 어르신들에 대한 탐문 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추가로 밝혀놓았다.

 

(1) “그 지역(=나마제)의 몇 원로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사고로 숨진 조선인들의 사연이 차차 드러났다. 고된 노동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공사장 근처에서 젖은 화약을 모닥불에 말리던 중 갑자기 폭발해 조선인 3명이 즉사했다. 무참한 모습이 되어버린 시신을, 함께 일하던 동포 인부들이 나무통이나 깡통에 담아서 키노모토()의 지장존(地蔵尊) 아래까지 짊어지고 가서 장작을 모아 화장하고, 울면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화장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아무도 일하지 않았고 아침부터 술만 마셨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울음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고 그런 날이 며칠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39)

 

1989년 9월7일 효고현 지역방송 <썬티비>가 방영한 정세화 선생의 인터뷰 장면. 당시 정홍영 선생은 <효고조선관계연구회>의 회원으로 이 지역 근대화를 위해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조사하고 발굴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정홍영 선생이 수집한 증언에 따르면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는 3명이다. 이는 4개의 신문기사가 사망자의 수를 2명이라고 보도한 것과 차이가 난다. 사고 발생과 함께 즉사한 윤길문씨와 병원으로 옮겨져 사망한 오이근씨 말고도 또 다른 사망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신문들은 사고발생 직후부터 48시간을 취재해 보도한 것이므로 그 이후에 사망자가 추가되었을 경우 이를 보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일선씨는 후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고, 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의 부상은 경상이었으므로, 추가로 사망한 사람은 오이목씨일 가능성이 크지만 결정적인 문헌증거가 나타나기 전에는 최종적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2) “또한 몇 사람을 탐문한 끝에 요시다 노무자 합숙소의 우두머리가 윤재유(尹在裕?)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공사현장에서 진두지휘한 k고 통칭 요시다 분키치(吉田文吉)로 불리던 그의 장남 윤일선(尹日善)이었다. 그는 공사와 합숙소의 현장지휘 책임 맡은 간사(=십장?)였는데, 인부들로부터는 항상 중대장(中隊長)이라고 불렸다. 사고로 죽은 세 명 중 두 명은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었지만, 한 명은 윤일선의 둘째 동생이었다고 한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40)

 

정홍영씨는 또 다른 탐문을 통해 다이너마이트 사고 현장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진 윤일선씨의 부친이 윤재유씨임을 알아냈다. 또 윤일선씨의 일본식 이름(=통명)이 요시다 분키지(吉田文吉)였으며, 윤일선씨는 윤재유씨의 장남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이에 더해 사고에서 사망한 윤길문씨가 윤일선씨의 둘째 동생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또 정홍영씨는 사고로 죽은 세 명이라는 증언을 다시 한 번 채집했다. 복수의 지역 원로들이 다이너마이트 사고의 사망자가 3명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고로 죽은 3명 중 2명은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 익명의 사망자 2명 중의 한 명은 오이근(25)씨였다. 다시 말해,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의 사망자가 더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앞으로 조사 작업에서 잊지 말고 확인해 볼 사항이다.

 

정홍영 선생이 다카라즈카 각 지역의 원로들을 찾아가 1910년대와 1920년대 조선인 노동자들의 상황과 사고 및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1989년 9월7일 효고현 케이블 <썬티비> 방영의 한 장면.)

 

(3) “타케다오에서 무코강을 따라 폐선 부지를 30분 정도 걸어가면, 길이 350미터의 6호 터널에 닿는다. 타케다오부터 강폭은 점차 넓어지고, 터널의 바로 앞에서 급커브를 그려 오른쪽 왼쪽으로 구불구불 꺾이고 있다. ... 주위를 유심히 살피면서 걷다가 모닥불을 피운 장소가 터널 입구에서 50미터 전방 왼쪽에 있는 콘크리트 보호벽 안쪽의 작은 공터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신문에는 가까운 오두막에서 취사를 하던 윤일선의 아내도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했는데, 그 오두막이 공사 노무자 합숙소였는지, 휴식용의 작은 집을 가리킨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또한 열차가 운행되고 있던 낮 시간에 터널 내부에서 발파를 시도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다이너마이트는 도대체 어디에 쓰기 위한 것이었을까. 또 어째서 시신을 그렇게 먼 키노모토까지 옮겼을까. 그런 의문을 풀어줄 단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글은 정홍영씨가 다케다오 지역을 직접 답사해 남긴 기록이다. 나가오산 자락의 신6호 터널의 입구에서 약 50미터 전방 왼쪽에 작은 공터가 있음을 발견했다. 정홍영씨는 이곳이 신문기사가 지적했던 오두막/함바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폭발이 발생한 입구에서 50미터쯤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취사준비를 하던 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는 가벼운 안면 찰과상을 입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4) “윤일선(尹日善)의 숙부는 일명 요시다 이치로(吉田一郞)라고 불렸는데, ... 처음에는 지역 토건업체를 경영하다가 나중에는 하청을 받아 하천 사방 교량 등의 공사를 했다. 옛 타케다오역 앞에서 무코강에 가설된 <온센교(温泉橋)> 1934년에 준공되었는데, ... 다리 공사를 할 때 합숙소가 건너편 냇가에 두 동이 있었고, 조선인 인부들이 숙박을 하고 있었는데 ... 이 합숙소의 우두머리가 나마제에서 온 요시다 이치로였다. 터널과 옹벽 등의 철도 관련 일이 끝난 뒤에도 윤일선(尹日善)은 요시다 합숙소뿐 아니라 나마제 일대의 조선인들을 보살피며 많은 인부를 거느리고 고베 수도 확장 공사, 롯코산의 사방 공사 등의 일을 했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

 

정홍영 선생이 직접 답사와 탐문으로 수집한 자료는 그의 저서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홍영 선생의 탐문조사에 따르면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사망한 윤길문과 그의 맏형 윤일선에게는 요시다 이치로(吉田一郞)라는 통명을 가진 숙부가 있었다. 즉 윤일선과 윤길문의 아버지 윤재유에게는 남자 형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일본식 통명은 요시다 이치로였다. 그리고 통명에 이치로(一郞)’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장남이고 윤일선과 윤길문의 아버지 윤재유는 그의 동생이었을 것이다.

 

(5) “해방 후인 1952, 오타타카와(大多) 강변의 산을 개척해 신설된 모리구미(森組) 채석장 건설 공사를 마지막으로 사촌동생인 윤창선(尹昌善)에게 뒤를 맡기고 나마제를 떠났고, 곧이어 모리구미(森組)의 하청업자로서 교토부(京都府)와 나라현(奈良縣)에서 많은 터널 공사를 도급맡았으나 이내 병에 걸렸고, 터널 공사를 하면서 나날을 보냈던 그의 일생을 오사카의 병원에서 마쳤다. 지금도 그의 사촌동생이 소가와에, 그의 딸들이 교토와 다카라즈카에 살고 있다. 윤일선씨는 생전에 술을 마시면 총각으로 죽은 동생(윤길문, 尹吉文)을 떠올리며 자주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

 

정홍영씨는 추가조사를 통해 윤길문-윤일선 형제의 가족이 더 있었음을 밝혔다. , 윤일선에게는 윤창선이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홍영 선생에 따르면 지금(=1990년대)도 윤창선이 소가와에 살고 있었으며, 윤일선의 딸들이 교토와 다카라즈카에 살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정홍영 선생의 추가조사를 정리해 보면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는 윤길문, 오이근씨와 그 밖의 성명과 연령 미상의 1명을 포함해 모두 3명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에서 가족 단위로 이주해온 이주노동자였을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는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가족사항이 자세히 조사-기록되어 있다.

 

사망한 윤길문씨의 가족은 그의 아버지 윤재유씨, 그의 큰아버지 요시다 이치로, 그의 큰형인 윤일선과 형수인 여시선/김시선/양시춘, 그리고 사촌 윤창선이 모두 한 가족의 구성원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들은 모두 경남 고성군 고성면 출신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다른 사망자 오이근씨에게는 오이목씨라는 형제가 있고,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들도 경남 고성군 고성면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두 가족에 대한 조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경남 고성을 중심으로 윤길문-윤일선-윤창선, 윤재유-요시다 이치로, 그리고 여시선/김시선/양시춘의 공식기록이나 족보 기록을 찾는 일이다. 또한 같은 지역에서 오이근-오이목씨의 공식기록과 족보기록을 탐색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른 한편, 일본에서는 다이너마이트 사고 이후 윤일선, 윤창선씨의 흔적을 탐문하고, 윤일선씨의 딸들이 다카라즈카와 교토에 살았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다카라즈카를 비롯한 효고현과 오사카, 그리고 교토에 걸쳐 폭넓은 탐문 조사를 시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jc, 2021/5/3)

 

[이 취재기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33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