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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자락길에서] 2. 철학의 길

서울의 안산 자락길을 걷다보면 전에 걸었던 다른 하이킹 트레일이나 산책길이 자주 떠오릅니다. 스페인의 <카미노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뉴욕주 부어히스빌의 <인디언 래더 트레일(Indian Ladder Trail)>, 교토의 <철학의 길(哲学)> 등이 그것입니다.

 

 

<카미노데 산티아고>는 프랑스의 생장피에포르에서 스페인의 피니스테라까지 8Km의 도보여행길로 제가 심신의 건강을 회복했던 길입니다. <인디언 래더 트레일>1.6킬로미터의 짧은 하이킹 트레일이지만 20년 동안 수백 번 걸었던 추억이 많은 길입니다.

 

 

<철학의 길>은 일본 교토(京都)에 있습니다. 긴가쿠지(銀閣寺) 입구에서 난센지(南禪寺) 입구까지 이어진 2킬로미터의 오솔길입니다. 작은 운하가 흐르고, 두 사람이 나란히 걷거나 간신히 어긋맞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 때로는 양편에, 때로는 한편에 뻗어 있습니다.

 

 

<철학의 길>은 사철 좋은 경치로 유명합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고, 여름밤에는 반딧불이 춤을 춥니다. 가을에는 단풍이 불타듯 붉고, 겨울에는 눈에 덮여 아름답습니다.

 

저는 늦봄과 늦가을에 이 길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나뭇잎이 이미 다 떨어진 가을에는 호젓한 산책길과 아직 따사롭던 햇살을 빼면 이렇다 할 경관은 없었지만, 벚꽃이 절정을 지나 눈 날리듯 흩날리며 떨어질 때에는 개울물이 온통 흰 꽃잎으로 뒤덮여 흐르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매년 810일이 <길의 날()>입니다. 1986년에 제정된 <길의 날>도로의 의미와 중요성에 관심을 갖도록시작된 기념일인데, 1987년의 제2회 길의 날에는 일본 전역의 아름다운 산책로 1백개를 선정했습니다. <철학의 길>이 그중 하나로 꼽힌 것이지요.

 

 

그래서 이 길이 아름답다는 것은 답사와 유래를 통해서 잘 알겠는데, 그 산책길이 어째서 <철학의 길>이라는 뜬금없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 산책길은 연장 20Km의 비와호소수(琵琶湖疏水)라는 수로가 건설(1885-1912)된 후에 만들어진 수로관리용 도로의 일부입니다. 1897년 그 인근에 교토대학교가 개교했습니다.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1913년 문과대학교수로 부임해 1928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철학과 종교학, 윤리학 등을 강의하면서 교토학파를 일으켰습니다.

 

 

일설에 니시다 기타로 교수가 매일 아침 이 길을 산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길이 수로의 오솔길(疏水小径), 산책길(散策), 사색의 길(思索) 등으로 붙리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 지역주민들이 경관보존운동을 벌이며 이 길을 정비한 끝에, 1972년 주민들의 합의로 이 산책길을 <철학의 길(哲学)>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교토의 <철학의 길>이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을 모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독일의 <철학자의 길>은 헤겔(1770-1831)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 시절(1816-1818), 그리고 괴테(1749-1832)가 질풍노도의 시기(1775)62세의 나이에 30세의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던 시절(1814-1815)에 이 길을 산책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괴테와 헤겔 전에도 <철학자의 길>은 있었습니다.

 

 

1386년 설립된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의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학부 초기에 철학 공부가 필수입니다. 철학 시험에 통과해야 전공을 정해 진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 1학년생을 철학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어린 철학자들은 수백 년 동안 하일리겐베르크 산기슭의 오솔길을 산책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이 <철학자의 길>이 된 것이지요.

 

 

굳이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이나 교토의 <철학의 길>이 아니어도 모든 길은 생각하게 합니다. 프레데리크 그로(Frédéric Gros)<걷기의 철학(Marcher, une philosophie, 2008)>을 쓴 것도 바로 이 정곡을 찌른 것이지요.

 

 

걷기는 몸만 단련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도 단련시켜 줍니다. 그래서 자락길이 제게는 아주 좋은 스승인 것이지요. (jc, 202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