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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2023취재

[도호쿠2023취재] 22. 아오모리 (8)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그리고 이시이 다쿠보쿠

일본 문학평론가들 중에는 이시이 다쿠보쿠의 시가 일제의 조선 강점을 비판하거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대체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했을 때 다쿠보쿠가 때 추모시를 발표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19091029일의 <이와테일보>백회통신이라는 제목으로 이토에 대한 애도의 글을 쓰고, 5수의 단가를 지어 경의를 표했습니다. 또 그해 115<도쿄아사히신문>에도 “114일의 노래 9라는 제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노래를 실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한 다쿠보쿠가 동시에 그 저격자 안중근에게 동조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일제의 조선병합은 이토 히로부미의 최대 업적인데, 그의 사망을 애도했던 다쿠보쿠가 이를 비판했을 리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20092월 메이지(明治)대학의 이시카와 다쿠보크 전문연구자 이케다 이사오(池田功) 교수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에게 있어서의 조선(石川啄木における朝鮮)”이라는 논문에서 이 두 시가 안중근의 거사와 조선인의 입장에 동조하는 작품이라면서 세 가지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작시의 시기 문제입니다. 이 두 시가 101일의 <창작>에 발표되었지만, 다쿠보쿠의 작시노트(歌稿ノート)에는 “99일밤에 지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창작>에 발표할 때에도 이 시들은 “9월 밤의 불평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지요.

 

 

이케다 이사오는 일본인에게 9는 불길한 숫자임을 지적합니다. 1908710일의 <메이세이(明星)>이라는 문예지에 <석파집>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시 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오늘 99일 밤9시를 치는 종을 신호로 산에서 해를 불태운다.”

(今日九月九日九時合図)”

 

'()'가 세 개나 나열된 시간에 해를 불태운다는 것은 불길한 일입니다. 음운론적으로도 구()괴로워한다(しむ, 구루시무)”는 단어의 첫 음절 구()를 가리킵니다. 다쿠보쿠가 이토 히로부미노래와 조선국 지도노래를 발표하면서 그 시작(詩作) 날짜를 99일이라고 명시한 것은 이토 암살과 조선 병합의 주제가 불길하고 괴로운 문제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문맥의 문제입니다. “9월 밤의 불평에는 모두 39수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이케다 이사오 교수는 거기에서 다쿠보쿠의 의식의 흐름이 읽혀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개인적인 괴로움을 노래하다가 죽음의 문제에 맞닥뜨렸고, 그러자 일 년 전에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이 연상되었고, 이어서 열흘 전에 보도된 조선국의 죽음의 문제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노래는 당연히 일제의 조선합방을 부정적으로 노래한 것이며, 조선합방을 추진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일본인으로서도 인정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시어의 문제입니다. 이케다 이사오 교수는 조선국 지도노래에 등장하는 추풍가을바람이라는 시어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9월 밤의 불평에 수록된 노래를 모두 검토한 결과 39수 중에서 17수의 노래에 가을이나 가을바람이라는 시어가 등장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케다 이사오 교수는 이 두 시어가 예외 없이 냉혹하고 경직되어 가는 일본의 사회상황을 가리킨다고 지적했습니다. , 다쿠보쿠의 이토 히로부미노래와 조선국 지도노래는 일제의 조선병합의 비판이면서 동시에 일본사회의 시대폐색을 비판한 노래라는 것입니다.

 

 

이케다 이사오 교수의 분석은 설득력이 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조선병합을 비판하고 안중근에 동조할 수 있었던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어째서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했을 때는 그렇게 절절하게 그를 애도했던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그 점이 다쿠보쿠가 위대한 시인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으로서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코스모폴리탄의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 동시에 세계인이었던 것이지요. (jc, 2023/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