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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감상모임

[칼의 노래] 1. 두 번째 감상 모임

심범섭 선생과 두 번째 감상 모임을 가졌다. 강릉 <설콩>에서였고, 첫 번째 이후 5개월만이었다. <하얼빈(2022, 김훈)>을 같이 읽은 것은 작년 9월이었는데, 그때는 글로 옮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른 일로 바빴고, ‘너무 좋다는 느낌에 벅찼고, 마음 한 켠에 이런 멋진 시간은 둘만 간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살짝 있었던 것 같다.

 

이번 <칼의 노래(2001, 김훈)> 감상은 몇 가지 적어놓고 싶은 게 생겼다. 첫 번째의 <하얼빈> 감상회도 좋았고, 그 때문에 같은 작가의 대표작 <칼의 노래>를 다음 감상의 책으로 정했던 것이었지만, 심선생과 나눈 <칼의 노래>가 너무 좋았다.

 

막상 글을 쓰려니까 그 시간을 뭐라고 불러야할지 망설여졌다. 감상(感想)은 약하고 사소했고, 비평(批評)은 건방지고 시답잖게 느껴졌다. 생각 끝에 감상(鑑賞)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글을 자세히 살피면서() 뜻을 충분히 즐긴다()는 말이겠으므로 모임의 성격으로 딱 맞았다.

 

 

실제로 우리는, 아니, 심범섭 선생은 작품을 매우 자세히 살핀다. 나는 두 번 읽었을 뿐이었고, 그래도 뭔가 이야기할 거리를 찾아내었던 자신을 뿌듯해 했다. 그러나 심선생은 <칼의 노래>를 다섯 번 읽었다. 책의 여백에는 빼곡히 메모가 되어 있었고 이야기할 구절과 내용이 노트에 정리되어 있었다. 

 

이같은 자세히 읽기를 통해서 심선생은, <칼의 노래> 전체를 통해 자연사라는 말이 5번 나온다는 점,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은 단 한번, 그것도 책의 맨 마지막 챕터의 제목에 딱 한 번 쓰였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아마도 나는 <칼의 노래>를 열 번 읽는다 해도 작품의 핵심어가 작가에 의해 몇 번이나 사용되었는지 세어볼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심범섭 선생의 감상은 신비평이다. 역사주의에 거리를 두고, 분석/형식주의에 가깝다. 다시 말해 작가의 개인사나 심리적 상황, 작품의 시대적, 사상적 배경 같은 것은 참고하지 않는다. 오로지 텍스트만 읽고, 그 텍스트의 형식과 내용만 가지고 의미를 찾아낸다.

 

나는 원래 신비평에 거부감이 있었다. 성경해석학을 조금 공부했던 나로서는 이런 경향이 쉽게 교조적으로 흐른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또 텍스트가 진공 속에 자리 잡은 것처럼 취급하면서, 나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할 위험이 내재한다는 점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범섭 선생의 전공은 신비평이었다. 작년 여름 심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그 분야를 선택하고 흠뻑 취했을 때를 회상하는 그의 표정이 얼마나 환했는지 기억이 생생했다. 한 사람을 저 정도로 신나게 만들고, 그런 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한번 제대로 얻어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년 9월 유행하던 <하얼빈>을 첫 책으로 정하면서 우리는 텍스트만 이야기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책만 읽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어를 뒤져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설명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안중근의 재판기록을 읽고 그것을 작품 속의 서술과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작가가 원고지에 연필로 써서 완성하고, 문학동네가 출판한 텍스트만 이야기하면 되었다. 다만 우리가 감상한 안중근은 김훈의 안중근이라는 점만 인정하면 되었다.

 

 

첫 번째 감상회는 굉장했다. 얼마나 굉장했냐면, 우리가 모임을 가졌던 <설콩>의 사장님이 일손을 놓고 우리 이야기를 경청하셨을 정도였다. 다음 모임도 <설콩>에서 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섯 달이 지나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224일의 <칼의 노래> 감상 때도 <설콩> 사장님은 카운터 뒤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계셨는데, “저 모임이 끝날 때까지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 말기를 바랐다고 하셨다.

 

진심이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심범섭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우리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그들이 우리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감상회가 그만큼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