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데뷔공연 프로그램 1부의 네 번째 연목은 <생명의 춤(生命の踊り)>이다. 프로그램에는 이 작품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4. 생명의 춤. 칸수이 타쿠모(寒水多久茂), 호무라 코지(法村康二), 야마모토 로쿠(山本綠), 오노 히데사쿠(大野兵作), 시바노 히사코(柴野久子), 야마자키 타츠코(山崎龍子), 카이 후지코(甲斐富士子), 김민자(金敏子)
고뇌 많은 인생... 그 다양한 모습을 하나의 군무로 정리해 보았다.
<생명의 춤>은 제목과 상연 무용수 8명의 이름, 그리고 “고뇌 많은 인생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설명 외에는 다른 설명이 없다. 심지어 어떤 음악을 배경으로 사용했는지도 밝혀져 있지 않다. (무음악 무용 작품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그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최승희의 <생명의 춤>은 이 공연이 초연이 아닌 듯하다. 1931년 5월1일 단성사에서 열린 최승희의 <제3회 신작발표회>에서 <생, 약동(生, 躍動)>이라는 작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춤(1934)>과 <생, 약동(1931)>은 군무(群舞)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1931년의 <생, 약동>은 최승희와 수명의 연구생에 의해 상연됐는데, 1934년의 <생명의 춤>도 8명의 이시이무용단 연구생들에 의해 상연된 군무였다.
1931년 5월1일자 <동아일보(4면)>에는 <생, 약동> 작품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이 사진에는 4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사진이 또렷하지 않아서 무용수들의 얼굴을 식별하기는 어렵지만, 인물들의 키와 몸집으로 미루어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최승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3명의 무용수는 누구였을까? 당시 최승희의 수제자는 장계성(張桂星)이었고, 그밖에도 김민자(金敏子), 이정자(李貞子), 조영숙(趙英淑)이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장계성을 수제자로 본 이유는, 그가 스승 최승희와 함께 <남양의 밤>이라는 듀엣 작품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후일, 도쿄시절에는 최승희와 함께 2인무 <희망을 안고서>에 출연하면서 김민자가 수제자로 올라섰다. 그러나 1931년 5월 공연 때까지만 해도 김민자는 3인무나 군무 외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반면, 조영숙과 이정자는 독무와 2인무에도 출연했다. 김민자는 트로이카에서도 막내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생 구성 상황은 최승희의 도쿄유학 초기와 유사하다. 당시에는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가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였고, 그 뒤를 이어 이시이 에이코(石井栄子), 최승희(崔承喜), 이시이 요시코(石井欣子)가 트로이카를 형성했었다.
이시이 코나미가 독립하고 난 뒤인 1930년대 초에는 이시이 에이코가 수제자, 최승희, 이시이 요시코, 그리고 후에 입단한 이시이 미도리(石井みとり)가 트로이카를 형성했고, 에이코가 독립한 뒤에는 최승희가 수제자, 미도리, 요시코, 이시이 미에코(石井美笑子)가 트로이카가 되었었다. 뒤이어 최승희가 독립한 뒤에는 미도리가 수제자, 요시코, 미에코, 이시이 시즈코(石井靜子)가 새로운 트로이카가 되었던 것이다.
<생,약동> 사진에 따르면, 최승희를 제외한 무용수는 3명이므로, 아마 이들은 장계성, 이정자, 조영숙이거나, 혹은 아예 수제자 장계성을 빼고 이정자, 조영숙, 김민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1931년 <제3회 신작발표회> 프로그램에는 <생, 약동> 작품이 “약동! 약진! 이 힘을 막을 자 누구냐? 우리의 생(生)을 씩씩하게, 굳세게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해설되어 있다. 이 서술에 따르면 <생, 약동>은 매우 빠르고 힘찬 무용작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생명의 춤>의 해설에는 “고뇌 많은 인생”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그러한 속에서도 씩씩하게 약동, 약진하는 생명의 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1934년의 <생명의 춤>은 1931년의 <생,약동>을 발전적으로 개작한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jc, 2024/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