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오사카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면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처음 들었고, 2020년 1월 고베의 <고베조고 취주악연주회>를 참관하면서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추도비에 대한 내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에 점점 끌렸고, 그들이야말로 1930년대에 일본 땅에서 조선무용을 처음 시작했던 최승희 선생의 진정한 후예들이라는 믿음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 학생들의 노력에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때마침 두 번의 만남으로 급속히 가까워진 정세화 선생이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정세화 선생이 나의 최승희 연구를 돕는 한편, 나는 조선학교를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일본 내 인맥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최승희 연구를 돕겠다는 정세화 선생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내가 어떻게 조선학교를 도울 수 있을지 몰랐다.
서울로 돌아와 연락을 계속하던 중 나는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정세화 선생도 좋다고 하셨다. 멋진 취주악 연주회를 열어준 고베조고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즉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한 켤레씩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고베조고는 정세화 선생의 모교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 제안에 대단히 흐뭇해 하셨던 것 같다.
결정이 되자 정세화 선생은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의 명단과 각 학생들의 신발 치수를 파악하기 시작하셨고, 나는 일반 모금을 시작했다. 오랜 외국 생활로 과거의 인맥이 거의 끊어진 나로서는 특정 지인들에게 기부를 요청할 방법은 없었고, 어차피 일반 모금을 해야 했다. 내가 하는 sns는 페이스북 밖에 없었으므로 거기서 출발하기로 했다.
이때 큰 원군이 나타났다. 최승희와 재일조선학교, 그리고 무용신 이야기를 듣고 이인형 선생이 동참해 주신 것이다. 이인형 선생은 발이 아주 넓어서 모금운동을 주도하기에 적임자였다. 그는 몸담아 활동하는 단체가 아주 많았고, 그중 일부에 나를 소개도 해 주셨다. 나도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모임을 중심으로 지인들을 찾아 협조를 당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노력은 페이스북에 기울였는데, 약 2주일 동안 계속된 모금운동에서는 97만원의 성금이 모금되었다. 정세화 선생이 파악해 주신 고베조고 무용부의 인원은 26명이었고, 지도교사를 포함해서 27켤레의 무용신을 준비하면 되었다. 97만원의 예산으로는 27켤레의 무용신 대금으로 충분했다.
그때 정세화 선생이 다시 제안을 하셨다. 무용신을 얼마간 더 주문할 수 있으니 마츠야마 소재 시코쿠 조선학교에도 무용신을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나는 좋다고 했고, 정세화 선생은 시코쿠 조선학교 무용부원과 지도교사를 위한 무용신의 신발칫수 조사하셨다.
무용신의 전달 시기는 3월초의 졸업식에 맞추기로 했다. 고베조고의 졸업식은 3월1일이었고, 이 행사에 맞춰서 모금운동을 주도했던 이인형 선생과 내가 이 졸업식에 참석해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인형 선생보다 먼저 출국한 나는 먼저 마츠야마에 들러 시코쿠 조선학교에 무용신을 전달했다. 무용부 학생이 5명에 불과했던 시코쿠 조선학교에서는 작은 무용발표회를 열어가며 환영해 주었고, 그런 환대를 받고 보니 내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였다.
고베조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식이 끝난 후에 무용부 학생들이 한데 모인 가운데 정세화 선생이 정성껏 준비해 주신 무용신을 무용교사에게 전달했다. 무용신을 하나씩 전해 받은 학생들은 너무너무 고마워해서 우리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그날 시코쿠와 고베에서 오고간 것은 ‘무용신’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무용신 한 켤레는 그리 비싼 물건도 아니고, 뭐 영원히 남을 선물도 아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대한민국 동포들이 재일조선인을 잊지 않고 있음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시코쿠와 고베에서의 아름다운 경험 때문에 우리는 조선학교 무용신 선물을 확대해 가기로 했다. (jc, 202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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